小滿(소만)과 夏至(하지) 무렵은 모내기와 보리베기를 하는 시기로 농촌은 연중 가장 바쁜 때이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속담은 이 무렵에 보리논의 보리를 베어야 모도 심고, 밭갈이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들으면 우스갯소리로 여길 줄 모르겠으나, 나의 생일이 이 즈음이라 생일 아침 한 끼라도 쌀밥에 미역국 밥상 받아 보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보릿고개의 고비를 넘기는 시점이 바로 그때이기 때문이다. 보리 수확과 모내기로 몹시 바쁜데다가, 가뭄까지 닥치면 다른 일에 눈길을 돌릴 겨를이 없다. 지금도 향리 舊宅(구택)에 가면 그 당시 시름겨워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연하다.
날이 가물어 자나 깨나 모내기 걱정으로 마음 편한 날이 없는데 보리밭 그루갈이로 심은 콩마저 싹이 노랗다. 아버지는 땡볕 아래 앞마당에서 보릿단을 태질치며 타작을 하시고, 어머니는 거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젖먹이 동생을 업은 채, 부엌 가마솥에 불을 때며 죽을 쑤셨다. 그 죽에도 쌀 한 톨 없었다. 또한 장작개비면 불질하기 편리하련만, 땔감이 보릿짚뿐이라 쉴 새 없이 아궁이에 밀어 넣어 주어야 하고 죽이 끓으면 계속 주걱 따위로 휘젓고 섞어주어야 한다.
바로 이 시절 내가 10세 때 일어난 일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나는 어머니 돈 5전(錢)을 훔쳤다. 월동 연료절약을 위해 사랑채는 세를 주고 온가족이 한방에 모여 자던 겨울밤은 길었다. 이 궁리 저 궁리에 잠도 오지 않던 밤, 어머니 주머니에 살그머니 손을 넣자 구멍 뚫린 5전짜리가 잡힌 것이 화근이었다. 1전을 훔쳐 군고구마를 사먹고자 했던 나에게 5전은 난데없는 월척(?)이었다.
어머니는 1주일이 지나도 5전의 행방을 묻지 않으셨다. 돗자리 밑에 넣어둔 돈이 혹시 발견될까 가슴을 졸였던 나에게 어머니의 침묵은 오히려 긴장감을 주다 못해 차라리 형벌이었다. 범인을 찾는다면, 나 아니면 아우밖에 없었으니 수사망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고 어머니는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고도 침묵으로 나를 훈계하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며칠 궁리 끝에 나는 1전을 주고 군고구마 2개 를 샀다. 따뜻하고 달착지근한 고구마가 입에서 사르르 녹으면서 1개가 마파람에 개 눈 감추듯 없어졌다. 나는 미각의 즐거움을 아끼고 싶어 입맛을 다시며 남은 1개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 순간,
"니 우째 고구마를 다 먹노..."
난데없이 나타난 친구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필경 니 어무이 돈을 훔쳤제? "
물증을 잡혀버린 나는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순진한 생각에 '4전은 도로 갖다 놓을끼다마.' 라며 얼버무렸던 대목은 지금 생각해도 바보 같기만 하다. 더구나 친구가 어머니께 고자질이라도 할까 두려워 2전이나 주고 빵까지 사서 나누어 먹음으로써 친구의 입을 막았으니 나로서는 눈물의 빵이었다. 그때 하도 魂怯(혼겁)이 나서 그 후 어머니 허리에 찬 주머니만 봐도 주눅이 들 정도라 그 뒤로는 일체의 저지레가 없었다.
최근 늦가을 어느 날, 군고구마 장사가 눈에 띄어 문득 과거의 그 사건을 떠올려보았다. 걸음을 멈추고 2개를 사보니 1전하던 고구마의 가격이 천원이나 했다. 실로 격세지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지금도 '고구마 두 개'는 어머니와 배고픔과 도둑질의 자책을 연상시키는 내 인생의 슬픈 흔적으로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
김수학 전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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