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Free Hugs "포옹은 위로가 됩니다"

"호주에서 시작된 '자유롭게 껴안기(Free Hugs)' 가 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구 시민들은 '낯선 이와 포옹'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단순한 인터뷰나 전문가 분석이 아니라 기자가 체험해보면 어떨까?"

데스크는 그런 취재방향을 정해놓고 다음 날 아침 철회했다. '연말 주제로 좋지만 무리'가 아닌가 하는 이유였다. '낯선 이와 포옹'이라니, 거리에서 '안아주세요.'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꼴은 민망하고 난감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궁금했다. '낯선 이와 포옹'은 어떤 느낌일까. -전문-

동성로는 크고 작은 광고간판이 넘쳐나는 곳이다. 형형색색의 글씨들이 넘쳐나는 거리에서 '안아 주세요.' 라는 밋밋한 글씨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럼에도 행인들의 시선은 '안아 주세요.'라는 글씨에 집중됐다.

호기심 어린 눈, 웃음을 머금은 눈, 궁금한 듯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 별 희한한 사람 다 보겠네 라는 눈…. 포옹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드물었다.

피켓을 든 채 기다리기를 20분, 여자 친구와 걷던 한 남자가 다가와 포옹을 청했다. 그는 호기롭게 포옹했으며 밝게 웃었다. 이윽고 친구와 지나던 20대 아가씨가 '정말 안아도 되느냐?'며 물었고, 역시 웃는 얼굴로 포옹했다. 5,6명이 떼지어 나온 여고생들은 '안아줘라. 안아보자.' 라며 서로를 밀어댔지만 누구도 포옹하려 들지 않았다.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3명은 '야, 야, 안아 달란다.'며 비아냥거리듯 웃으며 지나갔다. 그렇게 비아냥거리지 않아도 그들의 행동거지는 불량했고, 선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안을 여유는 없어 보였다. 60이 넘어 보이는 중년 남자는 '안아 주세요.'라는 피켓을 보았지만, 눈빛에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대체로 20대들은 웃는 얼굴, 30, 40대는 궁금한 눈, 50대 이상은 무심한 얼굴로 지나갔다.

20분이 더 지나고, 한 무리의 남자 대학생들이 다가와 포옹을 청했다. 그들은 기자와 포옹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끼리도 포옹했다. 동성로에서 작은 '포옹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행인들은 걸음을 멈추거나, 걷는 속도를 늦추고 퍼포먼스를 감상했다. 모두 즐겁게 웃었다. 누군가를 직접 껴안을 용기나 마음은 없지만, 포옹을 바라보는 것은 유쾌하다는 얼굴이었다.

영남대 학생이라고 밝힌 남학생은 "나도 학교에서 '프리허그(Free Hugs)'를 해봤다"며 포옹했다. 그는 '프리허그' 행사를 한 이유를 "자신이 포옹에 거부감이 없으며, 타인과 친밀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남대학교 자유게시판에는 '프리허그'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 올라와 있다.

'안습이더라(눈물이 나더라.) 아무도 안 안아 주더라. 이것이 우리의 정서란 말인가…' '가식이다.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는다.' '이 세상에 찌든 때를 씻으려는 사람 같아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라고 위로하는 느낌이었다.' '변태로 오해받지 않을까?'

낯선 사람과 포옹은 우리문화에는 낯설어 보인다. 포옹행사를 펼친 장소 인근 매장의 주인은 "요즘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뭐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기자의 설명을 귀 기울여 들었지만, 피켓을 들고 포옹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난감한 얼굴로 거절했다.

이 운동을 시작한 호주의 후안 역시 처음 'FREE HUGS'라고 쓴 피켓을 들고나섰을 때 정신병자 취급을 당했다. 어떤 문화권이든 낯선 사람과 신체접촉은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청년과 껴안은 사람들은 곧 '포옹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고 동참자가 하나둘 늘어갔다.

대구 동성로에서 벌인 낯선 사람과 포옹 역시 낯설고 어색했다. 그러나 포옹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타인의 포옹을 보는 사람들 대부분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만 민망해 할 뿐이었다.

◇ 취재후기 "신뢰와 친밀감 느껴"

나는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타인이 내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이런 습성은 나 혼자만의 특성이 아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이 같은 인간과 문화적 공간관계를 '근접학(近接學'Proxemics)'으로 설명했다. 근접학에 따르면 사람은 대략 45㎝까지를 친밀한 거리, 45∼120㎝를 개인적 거리, 120∼300㎝를 사회적 거리, 그리고 300㎝ 이상을 공공의 거리로 인식한다. 대략 팔을 뻗어 손이 닿을 정도의 범위를 개인적 공간으로 간주하고 이 공간 안에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불편함을 느끼거나 경계한다는 것이다.

포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단 1cm의 물리적 간격도 없어지는 상황이다. '근접학' 적으로 말하자면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으로 타인이 들어오는 행위이며, 동시에 내가 타인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낯선 사람을 껴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취재'가 아니었다면 기자 역시 감히 낯선 사람과 포옹을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막상 피켓을 들고 거리에 섰을 때 몇몇 사람이 포옹해주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물론 그들이 대부분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포옹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포옹하는 순간, 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취재할 때 기본적으로 간단한 인적사항을 묻기 마련이다. 포옹했던 사람들에게 인적사항을 묻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내게 보여준 신뢰에 대한 내 답이었다. 나를 껴안아 주었던 사람들은 내 직업이 무엇인지, 어떤 이유로 '안아달라.'고 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계산도 하지 않았고, 어떤 의문도 품지 않은 채 포옹에 응했다. 오직 호의로 포옹해주신 사람들에게 '사실은 이렇고 저래서, 이름과 직업을 알고 싶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야박한가.

낯선 사람일지라도 두 사람이 자발적으로 포옹한다면,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신뢰와 친밀감이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체험'을 통해 볼 때 그런 느낌은 확실해 보인다. 나는 포옹하는 순간 그들에게서 친밀감을 느꼈다. 가볍게 껴안은 사람보다 꽉 껴안은 사람에게서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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