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젠 品格의 사회로] ①부자, 질시에서 존중으로

"내 돈은 노동 대가, 네 돈은 불로 소득" 버리자! 야누스의 얼굴

"절벽에서 나뭇가지를 잡은 심정으로 죽을 힘을 다해 일했습니다. 돈이 된다면 남들이 꺼리는 일,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즐길 때 쾌락도 자제했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좋은 일도 하고 있지만 사회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집니다. 나 스스로 당당하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 탓도 있겠지요. 아직도 우리 사회는 '부자=도둑놈'이라는 시선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당당하지 못하고 때로는 외롭기도 합니다."

대구 남구청의 한 공무원은 지난해 노신사로부터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의 명단을 건네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노인의 집을 찾았다. 집안에는 낡은 TV와 빛바랜 가재도구들만 덩그렇게 있고 노인의 복색도 꾀죄죄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노인이 돈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갔다. 그 노인은 이후 월 500만원씩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성금을 내놨다. 노인은 젊은 시절 서문시장에서 포목상을 하며 종자돈을 벌었고 땅과 건물을 사들이면서 재산을 수십억원 모았다는 것이다.

사회에 알려도 되겠느냐는 공무원의 말에 그 노인은 손사래를 치며 "서문시장을 이용하는 대구시민의 도움으로 돈을 벌었는데 마음의 짐이 갈수록 무거워진다"며 이 사실이 알려지면 후원을 중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아들도 사업이 어렵지만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월 300여만원씩 이웃들을 돕고 있다.

성서공단의 김모 사장. 그는 장애인을 수십여명 채용하고 남몰래 복지시설에도 적잖은 기부를 해오고 있다. 또 아프리카 등 9개국 30개 지역 어린이와 복지시설에도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지난 3월 부자학연구회(회장 한동철·서울여대 교수)가 수십억원대의 재산을 가진 전국 83명의 부자를 대상으로 한 '부자철학' 설문조사(중복응답)에서 부자들은 ▷존경받는 부자상 정립(62.7%) ▷재산의 사회환원(39.8%) ▷더 많은 부의 창출(30%) ▷더 많은 세금 납부(13.3%) ▷국가에 봉사(10.8%) 등을 희망하고 있다고 답변, 사회 부의 재분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부자들은 또 반부자정서의 원인으로 투기나 탈세, 정경유착을 한 일부 부자들(43.37%), TV드라마 및 언론의 왜곡묘사(18.7%)를 주된 원인으로 꼽았다.

반면 같은 연구회가 일반인 201명을 대상으로 한'부자인식'에 대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과거의 부자들이 '완전히'(0.9%) 또는 '상당히(49.6%),'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됐다고 대답했다. 정당하게 부자가 됐다는 응답은 7.1%에 그쳤다.

우리 사회의 부자들에 대한 따가운 시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부자들을 경원시 하는 마음 한가운데 부자가 되고픈 욕망은 어느 사회보다 강하다. 대학생에서부터 직장인 등까지 가히'부자열풍'에 휩싸여 있다. 대학가에는 부자학 강의나 투자관련 강의가 단 몇분 만에 신청마감되고 수만명의 회원을 가진 인터넷 재테크 사이트는 하루가 멀다시피 생겨나고 있다. '재테크로 10억만들기 펀드'는 단 며칠 만에 수만명이 가입할 정도로 부자되기에 여념이 없다. 모두가 부자 되기를 열망하면서도 부자들을 미워하는 이중성 때문이다.

홍덕률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는 "70,80년대 개발시대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다수의 디딤돌(희생)로 부자들이 탄생하고, 그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심화됐지만 부자들의 사회적 의무가 국민 기대에 못미치면서 부자들에 부정적 인식이 생겨났다"며 "그러면서도 부자가 되고픈 욕망은 어느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당연한 욕구이자 희망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중적인 부자정서를 갖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계 각 국의 500대 부자가 지구촌 전체 부(富)의 절반을 차지하고 우리 나라도 상위 20%가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부자들이 자기 잇속만 챙길때 사회는 균형을 잃고 돈많은 부자는 있되 당당하고 아름다운 부자는 드물게 되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갑부 워런 버핏과 빌게이츠같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진자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존경받는 부자를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의 몫이다.

이재훈 영남대 경영학부 교수는 "부자가 많은 사회가 튼실한 사회이고 이는 선진국의 지표로 나타난다"며 "가진자의 의무를 다하는 전제하에서 부자가 대접받는 사회, 부자가 존중받는 사회가 돼야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돈은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의 것이다. 돈은 한곳으로만 몰리면 사회는 동맥경화에 시달리고 돈이 제대로 돌지 못하면 곳곳서 썩은 냄새가 난다. 반면 돈이 돌면 비료가 된다. 재산을 나누면 사회의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부자로 죽는 사람보다 부자로 사는 사람이 많아질때 경제는 물론 사회와 문화도 함께 발전하는 고품격 사회가 되지 않을까.

이춘수기자 zapper@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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