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휴가동안 무슨 일이…?]여행지에서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인솔한 적이 있다. 태국은 알다시피 밤문화가 무척이나 발달된 나라. 신혼여행 코스 중 하나로 게이쇼를 관람했다. 쇼가 끝나고 모두 제각각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일행 중 한 커플의 남자 여행객이 쇼에 출연했던 게이와 연락처를 주고받은 모양이다. 새신랑은 신부가 잠든 후 방을 몰래 빠져 나와 그를 만났다. 다음날, 새신랑은 해변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발견됐다. 알고 보니 그 게이가 돈을 몽땅 빼앗고 구타한 뒤 해변에 버리고 간 것. 그것을 본 신부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상상에 맡긴다. 그 부부, 아직까지 함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 여행사 직원이 들려준 이야기다. 여름 휴가지에선 별의별일이 다 일어난다.'여행'은 때론 뜻하지 않은 일로 나를 일깨우곤 한다. 설레임·감격으로, 때론 후회로, 부끄러움으로 말이다. 특히 해외여행은 돌발상황이 잦기 마련. 낯선 환경에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곤 없는, 새로운 곳에 내던져지기 때문이리라.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두발로여행사 조성래, 엑스코여행사 배주열, 고나우여행사 서영학 대표 등 지역 여행사 관계자들의 체험담과 배낭여행족, 그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여행지 추억을 살짝 들여다본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1. 멕시코에서 한국인 피랍사건이 발생했다니, 남의 일 같지 않다.

여행을 하다 보면 안전한 곳만 다닐 수는 없다. 80여개국을 여행하다 보니 제법 위험한 상황도 만나게 된다.

중남미 어느 나라에서의 일이다. 버스가 허름한 골목길을 돌아서는데, 거기서 총을 든 무장강도들이 타는 것이 아닌가!'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지갑을 통째로라도 내줄 심산으로 주머니를 더듬고 있었다. 그런데 현지인들은 익숙한 듯 10달러 정도를 내주는 것이었다. 갑자기 돈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총부리를 겨누고 나에게 온 그들에게 5달러를 내밀었다. "너무 적다며 더 내라"고 했다. 나는 "배낭여행하는 학생이라 돈이 없다"며 겁 없는 실랑이로 결국 5달러로 해결한 적이 있다.

지금도 인도 북부, 인도네시아 북부, 중남미 등은 치안이 불안하다. 여행지에서 갑자기 총부리를 겨눈 이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첫째, 돌아보면 안된다. 그들은 자기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둘째,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현지인들이 대처하는 방법을 잘 보고 따라하면 된다. 배낭여행족들은 한쪽 주머니에 빼앗길 돈을 미리 준비해둬야 한다. 그들도 실은 한쪽 주머니를 비워주면 만족한다. 특히 여름철 복대에 모든 귀중품을 넣어두는 것은 금물. 옷이 얇아 금세 표가 난다. 자유여행에서는 돈을 최대한 분산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물건을 살 때도'없는 척'해야 한다. 언젠가 파리에 맥주를 사면서 두툼한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그랬더니 허름한 노숙자가 숙소까지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2. 프랑스 파리의 한 공원. 호리호리한 남자 한명과 여자 한명이 계속 내 주위를 맴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계속 따라오는 듯 하더니 잠시 한눈 파는 사이 내 옷가방을 들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뿔싸! 짐작대로 소매치기 일당이었다. 미혼이지만 덩치는 왠만한 남자 못지 않은데다 태권도 등으로 평소 체력 하나는 자신있던 나는,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랐다. 20여분간 헉헉거리며 남자를 뒤쫒아가 잡자 마자 주먹을 날렸다. 도망가던 여자는 이것을 보고 기겁한 나머지 가방을 버리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나 역시 그녀를 뒤쫒아갔다. 얼마 못가 여자를 잡았고, 바로 한대 팼다. 분을 풀지 못해 씩씩거리고 있는데, 곧 경찰이 출동했고 우리는 경찰서로 연행됐다. 유럽에서 폭력은 절대 금물.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이국땅에서 경찰서행이라니. 다행히 소매치기들이 잘못했다고 하니 나를 훈방으로 풀어줬다. 악에 바치니 눈에 뵈는게 없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다혈질인 한국인은 일단 소매치기를 당했다 하면 독하게도 끝까지 뒤따라간단다. 소매치기들 사이에서도 한국인의 악명(?)은 널리 알려졌다고. 나 역시 여자의 몸이지만 겁 없이 이국의 소매치기들을 뒤쫒았던 기억은 지금도 짜릿하게 남아있다.

한때 유럽에서 소위 한국인'봉지족'여행객이 유행했다. 모두 소매치기에게 털리고 난 후 비닐봉지 하나로 여행을 계속하는 것. 숟가락·칫솔·항공권·유로패스만 들고도 어떻게든 남은 일정을 소화하기 마련이란다. 역시 '의지의 한국인'이다.

#3. 여행에서 로맨스를 즐기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유럽여행을 하다 보면 코스가 비슷해 같은 여행객을 여러 나라에서 마주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가는 곳 마다 현지 남자친구를 만드는 한국여성들도 몇몇 봤다. 이탈리아에선 이탈리아 남자, 독일에선 독일 남자와 팔짱을 끼고 다니니, 대단한 능력 아닌가.

유럽은 낮엔 고상한 문화도시이지만 밤은 한없이 야한 도시로 변한다. 술집마다 여성 나체모양의 네온싸인이 켜지니 호기심이 발동할 법도 하다. 특히 입구에 씌여진'20~30달러'표시만 보고 과감하게 들어가는 한국 남성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입장료일 뿐. 실제로 쇼를 관람하고 맥주 몇 병 마시다 보면 500~600달러 훌쩍 넘는 경우가 허다해 돈이 없어 못나오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 그런 술집을 부지런히 드나든 시절이 있었다. 수중에 딱 50달러만 들고서 말이다. 돈이 모자라니 온통 문신을 새긴'덩치'서너명이 나를 에워쌌다. 그러더니 3,4시간 동안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의외로 폭력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폭력이 큰 범죄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자연스레 노하우가 생겼다.'무조건 견디면 다 해결된다'는 것. 그들도 사실 관광객 상대로 바가지를 씌우기 때문에 돈이 없다고 뻗치면 그냥 50달러로도 해결된다. 몇 시간 잡혀있는 것이 대수랴.

#4. 20여년 전, 나는 일본에서 유학중이었다. 지금의 집사람인 당시 애인이 나를 보기 위해 모처럼만에 일본에 왔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한국 유학생 친구들도 아내를 반겨주었다. 하지만 이튿날 그녀의 온몸에 물집이 잡히고 가려움을 호소하는게 아닌가. 알고보니 수두에 걸린 것.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저마다 숨어서 집에 전화를 했다."엄마, 나 수두앓았어?"'기억이 안난다'는 대답을 들은 친구들은 그날부터 전전긍긍해야했다. 그래도 아내는 힘든 몸을 이끌고 나와 친구들을 위해 물집 가득한 손으로 밥과 반찬을 해주었다. 우리는 먹을 수도 없고 안먹을 수도 없는 진퇴양란의 상황. 그래도 친구들은 맛있는척 먹어줬다. 친구들은 아내가 있는 열흘간 수두의 공포에 떨어야했다.

아내가 다시 출국하는 날, 친구들은 진정 기쁜 마음으로 환송했다. 하지만 환승역 화장실에 들어간 아내가 15분이 지나도록 안나오는게 아닌가! 고열에 시달린 데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나머지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역무원에게 구급차를 부탁했고, 곧이어 역은 구급차 출동으로 비상사태가 됐다. 정신을 차린 아내는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들것에 실려 국립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연히 출국 비행기엔 타지 못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친구들은'아니, 왜 돌아왔냐'며 무척이나 당황해했다. 그 친구들은 지금도'참 먹기 어려운 밥이었다'고 회상한다.

#5. 미국 유학을 다녀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친구들과 함께 남미 여행을 계획했다. 미국을 경유해야 하기 때문에 미국 비자가 필요했는데, 나는 유학비자의 유효기간이 넉넉히 남아 여행사에 필요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일정이 맞지 않아 미국으로 혼자 떠나야 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 난데없이 뉴욕 경찰이 떼로 몰려오는게 아닌가. 비자 없이 미국에 들어왔기 때문이란다. 알고보니, 유학비자라 해도 한국에 6개월 이상 체류하면 그 효력이 사라진다고.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순식간에 해외 미아가 되어버렸다. 뉴욕경찰은 나를 당장 되돌려보내려 했고, 나는 울고불며 한 시간 이상 매달렸다. 결국 다시는 비자 없이 미국땅을 밟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얼마나 비참하고 서럽던지, 한국판'터미널'주인공이 될 뻔 했다.

#6. 70,80대 노인들을 모시고 여행을 가면 웃지 못할 일이 자주 발생한다. 괌에서 일어난 일. 수영장에서 수영한 후 간단하게 몸을 씻는 간이샤워장에서 한 할머니가 수영복을 다 벗어젖혔다. 그곳은 수영복을 입은 채로 씻는 곳이지 옷을 벗어서는 안된다! 황급히 다른 여자손님에게 부탁해 다시 옷을 입어달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일본 온천여행에서, 여행객들을 다다미방으로 안내해드렸다. 방의 이상 유무를 점검하기 위해 방에 들어가니 할머니 두 분이 신발벗어두는 곳에서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앉아계신게 아닌가. 깜짝 놀라 여기서 왜이러냐고 하시니"여기가 방 아니여?"라고 되물으신다."여긴 신발 벗어두는 곳"이라고 말씀드린 후 방문을 열어드렸더니"그케, 방이 너무 작더라"하시며 웃으셨다. 내가 모시고 간 최고령 할머니는 83세. 특히 허리가 꼬부라진 어르신들을 뵐 때는 민망할 정도다. 거의 기어가다시피 발걸음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여행은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다녀오라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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