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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와 함께 떠나는 세계여행]맛있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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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는 멋진 간판을 내건 레스토랑들이 즐비했지만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넘볼 수 있었던 건'케밥'. 꼬챙이에 꽂아 구운 고기를 얇게 썰어 야채와 함께 매콤한 드레싱을 쳐서 커다란 빵에 넣어주는 샌드위치. 물가 비싼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처음으로 케밥을 발견한 후 스톡홀름과 오슬로·코펜하겐과 암스테르담까지 가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 케밥을 먹었다. 원래는 터키 요리인데 유럽에는 터키인들이 하는 저렴한 케밥집이 많다.

KEBAB. 거리에서 이 알파벳 다섯글자만 봐도 조건반사처럼 군침이 흘렀다. 낯선 침대에서 외롭고 배고픈 잠을 자고난 아침에는 눈 뜨자마자 저절로 이 글자들이 아른거렸다. 뭉크와 렘브란트를 찾아간 미술관에서 세기의 명화들을 보면서도 나의 오감은 카페에서 풍겨나오는 빵(비쌀 것임에 분명한) 냄새에 곤두서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케밥을 상상하며 마음을 달랬다. 너무 처량하다고?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싸고 맛있는 케밥에도 한계가 온다. 암스테르담을 떠나기 위해 10Kg이 넘는 배낭을 어깨에 메고 더위에 씩씩거리며 아스팔트길을 걷던 날, 숨이 차올라 헥헥거리면서도 케밥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 때 달리는 자동차들에서 메케한 매연 냄새가'확-' 끼쳐왔다. 시끄러운 오토바이족들이'쌩-'지나가면서 내 배낭을 건드리는 바람에 나는 갑자기 휘청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케밥에서 그 동안 맡지 못했던 비린내가 났다. 냉정한 유럽 인심처럼, 외롭고 쓸쓸한 솔로여행의 고독처럼, 눈물나게 비정한 비린내였다. 나는 입에 문 케밥을 뱉어냈다.

그제서야 케밥 하나에 기대어온 나의 생존법이 바보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을 떠나도 나는 변한 게 없다. 핸드폰과 적금통장과 서울의 답답한 원룸에 내 청춘의 행복을 맡겨왔던 바보같은 내 20대의 생존법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나는 좀 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여행의 행복을 찾기로 했다. 처음에는 겨우 바게트에 딸기잼을 발라먹었다. 아침에 기다란 바게트빵 하나를 사서 반을 뚝 잘라먹고 나머지 반은 도시락을 싸서 가방에 넣어다녔다. 오전에 관광코스 하나를 섭렵한 후 공원벤치에 앉아 흐뭇하게 도시락을 열었다. 막 둘러보고 나온 유명 관광지보다 도시락을 먹고 있는 공원 벤치가 훨씬 멋져보였다. 나는 점점 창의력을 발휘해서 딸기잼 대신 야채샐러드(슈퍼마켓에서 판다)를, 알루미늄캔에 든 참치나 조림콩 같은 걸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먹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유명 박물관보다 대형슈퍼마켓을 먼저 찾아나섰다. 슈퍼마켓을 마치 박물관처럼 통로마다 구석구석 꼼꼼하게'관람'했다. 그러다 드디어 나는'요리'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로, 한국에서 나는 결코'요리'라는 걸 하지 않는다. 바쁘고 귀찮아서이다. 하지만 여행만 가면 요리의 달인이 된다. 그러니까'여행요리의 달인'인 셈이다.

시작은 스파게티였다. 유스호스텔 부엌에서 저녁마다 외국여행자들이 열심히 만드는 스파게티를 어깨너머로 배웠다. 매일 빵만 먹다가 부엌에서 탄생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더운 요리'를 먹으니 얼마나 행복하던지! 유럽의 슈퍼마켓에는 한국에서는 구경 못한 온갖 종류의 스파게티 재료가 있다. 스파게티는 면의 종류에 따라, 치즈의 종류에 따라, 채소와 고기와 해물의 종류에 따라 수십 가지의 다른 스파게티로 재탄생하는 놀라운 음식이다.

나는 점점 숙소를 옮기는 게 귀찮아졌다. 크고 깨끗한 부엌이 있는 숙소를 하나 제대로 잡으면 적어도 일주일은 꼼짝 안 하고 그 곳에 틀어박힌다. 토마토소스해물스파게티, 까르보나라, 봉골레스파게티…, 나는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스파게티의 변주'를 거듭하며 행복해 했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숙소가 있는 동네의 제과점·슈퍼마켓·피씨방 같은 곳으로 나들이한다. 이틀쯤 지나면 슈퍼마켓 주인 아저씨가 아는 척을 한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살아온 것처럼 그 도시가 정겨워진다. 숙소에만 틀어박혀 있어도 박물관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많이 그 도시에 대해 알게 된다. 여행이 맛있어질 때, 비로소'여행 고수'가 된다.

미노(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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