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 학습된 단어가 '패러다임'이다. 文法(문법)에서 '틀'을 의미하는 이 어렵고도 생소한 단어가 유행한 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럽지만 당시 우리로서는 이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무조건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10년 후, 이 단어가 다시 어슬렁거리고 있다. 이번에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나타났다. 월佳(가)의 금융 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자 기존 '자본주의'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금융은 지금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다.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지고 있다. 10년 전 한국의 외환위기 극복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그렇다. 세계는 지금 이데올로기 변화의 역사적인 전환점에 서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 경제를 번영으로 이끈 '신자유주의'가 마침내 수술대에 오른 것이다. 모든 규제를 혁파하고 자유로운 시장 기능에 맡기는 것이 경제성장의 지름길인 줄 알고 이를 금지옥엽으로 받들었는데 이 철옹성 같던 '신자유주의'가 하루아침에 얼굴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한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최근 '미국 주식회사의 몰락'이라는 기고문에서 "금융위기로 미국식 자본주의의 비전이 허물어졌다"고 단언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비대해져 온 '큰 정부'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온 '신자유주의'가 이제 설득력을 잃고 있다며 미국은 철저한 자기 개혁을 통해 미국 브랜드를 회복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미국이 패러다임을 바꾸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97년 외환위기는 동남아시아 일부에 국한된 문제였다. 그때는 'IMF'와 '미국'이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들의 요구대로 패러다임을 바꾼 덕분에 우리는 IMF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승이었던 미국이 스스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할 판국이다. 패러다임이 어느 방향을 갈지 알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은 이제 어떤 식으로든 변화할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미국경제의 훌륭한 복사판이었던 한국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은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 시대로 넘어오면서 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정보화 시대를 잘 맞이한 덕분에 국민소득 2만 달러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 성장의 이면에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충실히 추종한 덕택(?)도 있었다.
한국은 어찌 보면 미국보다 더 자유주의적이다. 황금만능에 더 젖어 있다. 이익만 있다면 질서고 체면이고 없다. 오로지 승자에게만 영광이 돌아가는 사회풍조. 누구보다 간섭을 싫어하고, 내 돈으로 내 맘 대로 하는 엄청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늦게 배운 도둑,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셈이다. 이런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하니 정작 미국보다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 틀림없다.
임경업 장군,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침략을 막으려고 백마산성을 굳게 지킨 인물이다. 청 太宗(태종) 홍타이지는 이를 알고 백마산성을 피해 서울로 직행,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을 공격하여 45일 만에 항복을 받아낸다. 그런데 임금이 항복했는데도 임경업은 외롭게 백마산성을 지켰다. 오히려 승전하고 돌아가는 청군을 공격, 포로와 말을 구출하기도 했다. 본진은 무너졌는데 변방에서 성을 지키는 임경업, 그는 장군으로서는 훌륭하게 大義(대의)를 지켰으나 요즘 시각에서 보면 역사의 큰 흐름은 놓친 셈이다. 세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이제 미국이 패러다임을 바꾸면 한국은 더 많은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이번에는 보고 따라할 사람도 없다. 일은 미국 쪽에서 터졌지만 한국은 외환위기 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
세상이 변하는데 나 홀로 백마산성을 지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또다시 고통스런 단어로 다가오고 있다.
尹柱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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