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흩뿌렸다. 영천 국도에서 16㎞ 떨어진 시안미술관을 찾아가는 길은 가을로 익어가고 있었다. 이 계절을 배경으로 미술관 야외전시장에는 박충흠의 대형작품들이 둥글게 혹은 뾰족하게 솟아있다. 동판으로 만든 세모 네모 둥근 모양의 작품들, 우주비행선처럼 생긴 조각작품들로 야외전시장은 혹성 같은 모습이다.
조각가 박충흠. 그는 우리에게 낯설다. 대구경북과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는 1946년 서울 출생이며 서울대 조소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원시절 국전에 입상했고 20대 후반 서울에 있는 대학의 교수로 자리 잡았다. 독립기념관의 3·1운동기념비 등 여러 공공조형물도 그가 제작했다. 그가 대구경북에서는 처음으로 그것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대규모 작품전을 열고 있다. 야외 조각공원에 7점, 미술관내부 2, 3층 4곳에 모두 18점. 모두가 대형작품들이다.
스스로 '땜쟁이'라고 말하는 조각가 박충흠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의 '파격'부터 살펴야 한다. 그는 20대부터 모두가 질투할 만큼 잘나가던 작가였다. 그런 그가 40대 초반(1989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접었다. 잘나갈때 전시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00년에는 이화여대 교수직까지 그만뒀다. 그리고는 과천 작업실에서 칩거하며 은둔자처럼 살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번 전시는 전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20년 만에 보여주는 그의 대규모 작품전이기 때문이다.
잘나갈 때 모든 것을 버린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겸허하고 진실한 자세로 작업을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더욱 충실하고 싶었다"고 했다. 명성과 명예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진작 깨달은 듯하다. 그는 작업실에 칩거하면서 세모와 네모꼴로 수천개를 잘라내 이를 산소용접으로 일일이 붙이는 작업을 했다. 오리고 붙이고… 집요하게 반복되는 작업은 구도자의 그것과 닮았다. 수천℃가 넘는 용접기에서 뿜어나오는 파란 불빛에 의해 동판들이 붉게 달아오르다가 녹아서 서로 붙고 다시 차갑게 식는 과정에서 그는 삶의 본질을 발견했을까. 집착할 것도 좇아야할 것도 없음을…
그의 작품 포인트는 틈이다. 세모와 네모꼴을 무수히 접합하면서 생성되는 틈이다. 이 틈으로 자연의 빛과 인공의 빛이 안과 밖으로 소통하고 공간으로 확장된다. 빛의 확장을 통해 그의 작품은 또다른 작품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틈을 이용한 작품의 발상이 신선하다는 지적에 작가는 프랑스 유학시절 한순간의 강렬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작가는 "20여년 전 프랑스 시골에서 그림을 아예 접고 낚시나 하고 지낼 때 비가 쏟아졌다. 어느 순간 비가 개자 천지가 맑고 투명해지면서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던 빛을 보았을 때 받았던 감동을 작품에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맑고 투명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틈을 이용한 작품이다. 이런 감동은 전시관 내부의 작품들에서 더 강렬하게 드러난다.
시안미술관을 보고 첫눈에 반해 전시회를 하기로 마음을 열었다는 작가. 그의 작품은 내년 4월 6일까지 전시된다. 054-338-9391.
김순재기자 sj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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