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겠지만 1990년대 초 우리 사회를 경악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1991년 1월 전북 남원에서 발생한 세칭 '김부남 사건'이다. 당시 30세였던 김부남이라는 여성이 이웃집 아저씨를 살해했다. 알고 보니 그녀 나이 겨우 9세 때 그 남자로부터 성폭행당했고, 그 때문에 성인이 돼 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 헤매다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한 가해자에게 복수한 것이었다. 당시 김씨는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고 절규했다. 사건 발생 21년 만의 일이었다. 국내 성폭력 추방 운동사 10대 사건에 꼽히는 사건이다.
서구사회에서는 소수 인종이나 동성애자, 특정 종교인 등에 테러를 가하는 이른바 '증오범죄(hate crime)'가 종종 일어난다. 원한이 개인적이라면 이 경우의 증오는 대개 자신과 다른 사회적 약자층에 대한 이유 없는 미움에서 비롯된다. 백인우월주의 집단인 미국의 KKK나 독일의 네오 나치주의자, 슬라브 우월주의에 젖은 러시아 스킨헤드 등에 의한 범죄다. 미국 경우 소수 인종에 대한 증오범죄를 자행하는 극우 단체가 수백 개나 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1991년부터 증오범죄를 공식 범죄 통계의 한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을 정도다.
인간의 수많은 감정 중 원한이나 증오만큼 사람의 심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도 드물 성싶다. 더군다나 그것이 수년 또는 수십 년간 해묵은 체증처럼 가슴 한복판에 딱 자리 잡고 있다면….
21년 전 체벌당한 것에 앙심 품은 30대 제자가 50대 스승을 흉기로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터졌다. 고교 때 시험 도중 교사로부터 커닝을 했다는 지적과 함께 체벌을 받았던 남성이 수차례나 전화로 사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다 끝내 은사를 살해한 것이다.
참담한 일이다. 본인은 억울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스승에게 그토록 잔인하게 보복한단 말인가. 21년간의 집요함이 섬뜩할 정도다.
경찰청이 최근 한 달간 인터넷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와 악성댓글을 단속한 결과 2천30명을 적발하고 그 중 11명을 구속했다. "명예훼손이나 모욕적인 스토킹 등은 원한이나 애정문제로 앙심을 품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분석됐다. '원한' 또는 '증오'는 보이지 않는 흉기나 다름없다. 자신과 상대방의 삶을 모두 파괴시킬 수도 있는…. 사람과 사람 간 벽이 자꾸만 높아가는 현대사회의 무서운 이면이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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