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재&문화] 경북대 교정 석조부도 2점

"고향을 잃어버린 석조부도"

대구시내 경북대학교의 교정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문화재가 두 점이나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보물 제135호와 보물 제258호인 이 문화재들의 지정명칭이 달랑 '석조부도'이다.

대개 석조유물의 이름은 소재지 사찰 또는 행정지명을 따서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또는 '달성 도학동 석조부도'처럼 작명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것은 무슨 동네이름과 같은 수식어도 없이 그냥 '석조부도'라고만 되어 있다.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원래 이 석조부도들이 처음 보물로 지정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과 1942년이었다. 그 시절에는 각각 보물 제222호와 제397호라는 지정번호가 주어져 있었는데, 소장자는 모두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대구에 있던 남선전기(오늘날의 한국전력)의 사장으로 대구시 동문동 38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그는 상당한 재력을 바탕으로 조선 땅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대단한 골동서화의 수집가였으며, 이 석조부도들 역시 그가 수집하여 자신의 정원에 놓아두었던 것들이었다.

그러한 그가 일제 패망 때에 급히 물러나면서 그의 소장품 가운데 알짜만을 골라서 일본으로 가져갔고, 나중에 이것들은 대부분 교토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으니 그것이 곧 이름하여 '오구라 컬렉션'이란 것이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그가 저지른 공동서화의 수집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그가 그러고도 처리하지 못했던 유물들은 자기 집의 마루 밑에다 그대로 숨겨두었던 모양인데, 이것들이 무려 20년 만인 1964년 5월에 발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도 있었다. 이 당시에 수습된 유물들은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수집한 상당수의 골동품이 얼마나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던 것인지 도대체 어떤 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점은 그의 집 정원에 놓아두었던 두 점의 석조부도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가운데 기단부에 네 마리의 용이 얽혀 있어 흡사 경기도 여주의 고달사지 석조부도를 연상케 하는 보물 제135호 석조부도에 대해서는 '청구학총' 1936년 5월호에 "강원도 원주군 거돈사지에서 옮겨졌다고 한다"라는 구절이 남아있지만, 이 기록 자체가 그다지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1937년에 조선총독부가 직접 발간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요람'이라는 자료에도 이와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나, 그들 스스로 이러한 증언을 무시하고 '석조부도'라는 이름만으로 보물을 지정고시한 것을 보면 거돈사지 반출설은 거의 믿을 수 없는 내용으로 치부되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 석조부도들은 해방 이후에 국유재산으로 귀속되었다가 대구시립박물관 부실관리사건이 불거진 1957년 2월에 대구시와 경북대학교 사이에 관리위탁계약이 체결된 것을 계기로 경북대학교 교정으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을 거쳤다. 그 사이에 1962년 문화재보호법의 제정과 더불어 기존의 보물지정번호가 크게 조정되었으나 그 원출토지만큼은 끝내 밝혀지지 않아서 지금도 '석조부도'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그냥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지금의 이름은 그저 돈이 될만한 것이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던 골동상과 값나가는 물건이면 무조건 사들였던 일본인 재력가의 탐욕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사람이건 문화재건 간에 제 고향이 어딘지를 모른다는 것은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으로 서럽고도 서글픈 일이다.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