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대 미국 대통령 당선자인 버락 오바마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는 바람의 도시, 건축의 도시, 공공예술의 도시다. 오대호 가운데 하나인 미시간호에 인접해 있어 유난히 바람이 많다. 1871년 시카고의 3분의 2를 태운 대화재는 시카고를 20세기 건축 실험의 각축장으로 변모시켰다. 노예 해방 후 남쪽에서 올라 온 흑인들이 대거 이주한 곳이며 마피아 대부 알 카포네가 활약한 근거지라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미국 내에서 범죄율이 가장 높으며 인종과 빈곤문제도 심각하다. 사회 통합을 목표로 하는 공공예술이 발전하게 된 이유다. 시카고 공공예술의 특징 중 하나가 탁월한 공간 해석과 훼손의 미학을 즐기는 것이다.
◆만지고 반응하라
시카고의 얼굴 밀레니엄공원은 상업중심지구(LOOP)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다. 애초 건립예산이 1억5천만달러였지만 3년 공사과정에서 4억7천500만달러로 늘어났다. 스페인 구겐하임 미술관 등을 디자인한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개리가 설계한 잔디공연장 '프리츠커 파빌리온' 등 여러 가지 볼거리가 많은 이곳에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기발한 설치조각 두 작품이다. 영국 조각가 애니시 카푸의 작품 'Cloud Gate'와 문자를 활용한 인물조각으로 널리 알려진 스페인 출신 조각가 자우메 플렌사의 'The Crown Fountain'은 단순히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고 담아내는 것을 중요시하는 최근 공공예술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Cloud Gate'는 밀레니엄공원의 랜드마크다. 미국 최대 통신회사 AT&T 소유로 야외 설치 조각품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무겁다(110t). 콩처럼 생긴 모양 때문에 'Bean'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표면이 거울처럼 투명해 도시 경관과 관람자의 모습이 작품에 고스란히 비친다. 'Cloud Gate'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양팔을 들어 'Cloud Gate'를 두 손으로 받치는 시늉을 하거나 아예 작품 아래 누워서 발로 들어올리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사람 등 다양한 광경이 연출된다.
'The Crown Fountain'은 광장에 설치된 대형 분수다. LED스크린에는 시카고에 거주하는 1천명의 시민 얼굴이 번갈아 나타나며 입 부분에서는 물이 쏟아진다. 여름이면 'The Crown Fountain'이 설치된 광장은 시민들의 물놀이 장소로 탈바꿈한다. 광장 바닥에 배수시설을 설치, 시민들이 미끄러져 다치는 것을 예방하는 세심함도 엿볼 수 있다.
워싱턴거리에 있는 '리처드 제이 델리 시빅 센터(Richard J. Daley Civic Center)' 광장 앞에는 파블로 피카소가 1967년에 만든 조각 작품이 서 있다. 설치될 당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킨 작품이다. 피카소가 작품비 10만달러를 사양하고 시카고시에 기증한 것이다. 강철로 만든 이 작품은 추상적인 디자인 때문에 많은 사람을 당혹게 만들었고 설치 당시 파격적인 재료와 거대한 크기로 인해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카고의 피카소'로 불리며 시카고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놀라운 점은 피카소 작품이 아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작품이 설치된 광장에는 각종 축제와 집회가 많이 열린다. 기자가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 마침 할로윈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광장 한쪽에서 광대들의 줄타기 묘기가 벌어지는 순간, 아이들은 피카소 작품 위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며 놀고 있었다. 잔디밭에도 못 들어가게 하는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면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다. 피할 수 없는 훼손을 인위적으로 막는 것보다 시민들이 느끼는 즐거움의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시카고 예술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광준 서울시 도시갤러리 책임 큐레이터는 "반응성 높은 작품을 좋은 작품으로 간주하는 것이 최근 공공예술의 흐름"이라며 "밀레니엄공원의 특징은 설치 조각 작품을 만지며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공간을 읽어라
밀레니엄 공원 기획 단계에서 공간 특성에 맞는 작품 설치를 계획했다. 'Cloud Gate'와 'The Crown Fountain' 두 작품을 보면 시카고 주요 건물이 한 시야에 모두 들어온다. 도심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작품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시카고 상업중심지구에는 작품과 건물의 상호 연관성을 잘 살펴 볼 수 있는 대형 야외조각품들이 산재해 있다. 연방정부 기관들이 입주해 있는 '페더럴 센터(Federal Center)' 광장 앞에는 모빌의 창시자 알렉산더 칼더의 1974년 작 'Flamingo'가 자리 잡고 있다. 날아갈 듯한 역동적인 모습은 연방건물의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상쇄시키며 도심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제임스 알 톰슨센터(James R. Thompson Center)' 광장에는 쟝 드 뷔페의 1984년 작 'Monument with Standing Beast'가 있다. 프랑스 비정형예술의 영향을 받아 문명화된 문화에 비판을 가하는 작가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반영된 작품이다. 작품 중앙이 뚫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면 하늘이 보인다. 주 정부센터가 입주해 있는 '제임스 알 톰슨센터'에 들어가면 작가의 작품 디자인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건물 중앙이 원통형으로 비어 있어 작품과 건물의 디자인이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체이스 타워(Chase Tower)'에는 샤갈의 1974년 작품 'The Four Seasons'이 있다. 쉽게 보기 힘든 샤갈의 실외 작품으로 전철역에서 나오면 바로 보인다. 회색빛 도심에 생기를 불어 넣기 위해 250개의 색 타일을 모자이크 기법으로 이어 붙여 화려한 색감을 자랑한다. 샤갈이 장소에 적합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디자인을 변경한 것으로 유명하다. 새, 물고기, 꽃, 사랑하는 연인 등과 함께 시카고 특성을 살리기 위해 시카고 도심 스카이라인을 작품에 포함됐다.
◆시카고 공공예술 시스템
'Flamingo'와 'Monument with Standing Beast'는 공공건물을 지을 때 순수 건설비의 1.33%를 조형물 설치에 투자하도록 한 시카고시 법에 따라 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법률이 있다. 하지만 국내 작품 가운데 주목을 받는 것은 많지 않다. 반면 시카고 문화센터 공공예술프로그램 큐레이터인 나단 메이슨(Nathan Mason)은 "시카고의 한 관광회사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시카고를 방문한 사람들이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인해 일정을 연장, 연간 200만달러 이상을 더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광준 책임 큐레이터는 "기획자가 공간의 특성을 잘 읽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세계적 작가의 작품을 설치해도 실패한다. 기획자와 작가가 공간적 특성을 담아내기 위해 지속적인 대화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는 장소와 시민들의 욕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작가 선정 과정에서도 시카고는 투명성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어 이를 둘러싼 잡음이 거의 없다. 작품이 설치될 지역 대표자와 주민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50~100명의 작가 가운데 5~10명을 우선 선발한 뒤 이들 작가로부터 받은 제안서를 가지고 다시 주민 의견을 청취해 최종적으로 작가를 선정한다. 법에는 지역 작가와 국제적인 작가를 50%씩 선정하도록 되어 있으나 지역 문화발전과 지역 주민들의 의견 존중 등을 이유로 75%가 지역 작가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다.
또 1.33%법 적용을 받지 않는 민간건물에도 작품이 많이 설치될 수 있도록 기부를 활성화하는 제도를 마련해 두었다. 기부자에게는 세금혜택과 함께 기부를 알리는 푯말을 설치해 돈 대신 명예를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샤갈 작품 'The Four Seasons'도 여러 사람이 기금을 마련해 기부한 것이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기금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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