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프랑스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구르몽이 쓴 이 유명한 시의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좋으냐고, 좋으냐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묻지만 시 속의 '시몬'이라는 자는 가타부타 끝내 대답이 없다. 이 시의 맛은 바로 이 묵묵부답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길고 긴 여운이며, 가을 깊숙이 걸어 들어가는 낙엽 지는 숲길이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나지막한 소리", 낙엽 밟는 소리가 나는 좋다. 낙엽 밟히는 소리가 꼭 나지막한 것은 아니다. 저문 퇴근길에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을 지나가면 넓적넓적한 이파리들이 무슨 결심이라도 한듯 한 근, 두 근 묶음으로 떨어진다. 그걸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그 우는 소리의 반경이 물경 '뻥튀기'만해서 오지다. 가슴 속의 응어리, 혹은 쓸쓸함의 '부럼'을 깨는, 씹는 맛이어서 좋다.
낙엽 밟히는 너비, 그 맛이야 오동잎 만한 것이 또 있을까. 도시의 가로수로는 쓰지 않지만 내게는 오동나무 낙엽이야말로 우리나라 가을의 검은 날개이며, 그리하여 고향 가는 느린 '항공편'이다. 내 고향집 뒤 둑길엔 젊을 적 할아버지가 심었다는 일곱 그루의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서있었고, 그 산꼭대기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 같았던 오동나무 낙엽은 지금도 달밤엔 마음에 밟힌다. 그것은 근동의 소문이거나 사투리 같은 맛, 향수여서 좋다.
가장 곱게 단풍드는 감나무 낙엽도 빼놓을 수 없다. 잎 두께가 비교적 두꺼운 편이라 그 무게 때문인지 가파른 사선을 그으며 뚝, 뚝, 듣는다. 그렇게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것이 감나무 낙엽이다. 마당 앞이며 뒤뜰에 수북이 쌓여 푹신푹신하게 밟히는 지난 계절의 그늘, 그 서늘한 냄새가 좋다. 또 '최경량급'의 대추나무 낙엽은 어떤가. 한 올 가느다란 바람까지도 끝까지 뒤쫓아 가 작은 얼레에다 남김없이 팽글팽글 감아 들이는 공중제비라니…, 그리움엔 미추가 없다. 눈에 밟히는 것들은 모두 살붙이 같아서 좋다.
'바람잡이 낙엽'이라면 벚나무 가로수 낙엽들도 한바탕 하는 편이다. 주둥이가 조붓한 벚나무 낙엽들은 새떼처럼 소란하게 몰려다닌다. 잘 밟히지도 않는다. 행인들의 뒤꿈치에다 입방아를 찧거나 등 뒤에 긴 망토처럼 따라붙기도 하고, 심지어 질주하는 차량들의 꽁무니를 물고 늘어지기도 하고, 붉은 벽돌담장에 달라붙었다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음표이기도 하고, 저 허공의 비닐봉지하고도 잘 논다.
은행나무 낙엽은 한두 살 더 먹은 듯 신중한 편이다. 벚나무 낙엽보다는 한 동작 덜 나부끼고 덜 구른다. 은행나무 낙엽은 일단 먼저 나무 밑둥치에 소복하게 쌓인다. 잎잎이 따로 반짝이던 것들이 난생 처음 한데 모여 "서로 몸을 의지하"는 온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바람이 불면 은행나무 낙엽이야말로 황홀하다. 아연, 환하게 폭발하는 나비떼다.
마로니에 낙엽은 다분히 도회적이고 신식 유행가 풍이다. 옛날 영화, 멜로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흔히 낙엽 지는 거리를 골라 걸었다. 큰 키에 롱코트를 걸치고, 코트의 깃을 세워 길게 뺀 하관을 묻고, 포켓 깊숙이 두 손을 찌른 채 머플러 자락을 폼 나게 휘날리던…, 그렇게 "우리도 언젠가 가련한 낙엽"을 읊으며 하염없이, 그리고 길 끝까지 걸었다. 십중팔구 희망을 암시하던 그 길 끝, 깡그리 망하는 결말이 아니어서 좋다.
나무들마다 다른 낙엽의 방식, 누구나 싫든 좋든 자기인생의 주인공이다. 지금처럼 경제가 어려울수록 삶의 여유가 필요한 것이라면, 가끔은 무심하게 낙엽 밟는 소리에 취해보는 것도 괜찮은 휴식일 듯싶다. 그 소리는, 잎 진 나무의 큰 키처럼 당신의 자존감을 한 눈금씩 밀어올려 주는 것. 발자국, 발자국마다 사람의 근심도 그렇게 낙엽처럼 깨끗이 부서질 것이다. 고독은 결코 해로운 '음식'이 아니다. 혼자 밟는 낙엽의 길, 우회의 그 느린 걸음은 바로 자기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는 '영양가' 높은 지름길일 수도 있겠다. 그다지 '운동'은 되지 않겠지만 반 시간이나 한 시간 정도 낙엽을 밟으며, 그 '고향의 맛'도 가슴으로 우물거리며, 걸어서 집에 가보는 건 어떨까. 나도 가을엔 일부러 자주 걷는 편이다.
문인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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