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퇴임식 챙겨준 회사 후배들에 감동

어느 집이나 가족 사진을 정리한 앨범이 몇 권씩 있게 마련이지만 내방 책꽂이에는 아주 특별한 한권의 앨범이 자리하고 있다. 때때로 펼쳐보면 그때의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지고 가슴이 짠해지면서 순간 일상의 고민들이 안개 걷히듯 사라져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그런 앨범이다.

1995년 1월의 마지막 주 퇴근 무렵. 11년간 사회복지기관에서 관리자로서 직장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하는 날이었다. 직원들은 하나둘 내 방문을 노크하며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가겠노라며 총총히 퇴근을 했다. 마지막 날이라 은근히 송별회라도 기대했는데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직원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았나 보다' '내가 이렇게 직원들의 신망을 받지 못했나?' '인간 관계를 잘못했나?' '그래도 그렇지?' 등 약간은 화도 나고, 슬프고, 섭섭함과 허전함이 교차되는 복잡한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어느덧 모두들 퇴근하고 적막이 흐르는 사무실에는 한 명의 직원만이 남아 있었다. "서운하시죠? 약속이 있는지 바쁘다며 다들 퇴근하네요. 저하고 한잔 하시죠?"라고 말을 건넨다. "그래 좀 서운하긴 하네. 그냥 둘이서 한잔하지 뭐."

함께 간 직원은 어디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2층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을 여는 순간 함성과 폭죽이 터지고 요란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먼저 퇴근한 직원들이 다 모여서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완벽하게 준비된 속임수에 일순 서운했던 감정은 놀람과 미안함으로 벅차 오르는 감동을 내게 주었다.

그날 직원들이 준비해준 선물이 지금도 나의 든든한 보물이 된 '추억록'이라는 앨범이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했던 직원들이 지면을 나누어 각각 마음을 담은 편지와 사진과 카드로 꾸며 놓았다.

지금도 '추억록'을 펼치면 15년 전의 이야기가 시간을 잊은 듯 담겨 있고 그때 그 얼굴들이 그리워지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 따스함이 화롯불처럼 은은하게 피어 새롭게 삶의 의욕과 힘을 얻게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주고받지만 두고두고 아끼는 보물 같은 선물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삶의 최고의 선물은 화려하고 비싸진 않지만 마음이 담긴 한 장의 메모처럼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그런 선물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고 소중하게 오래오래 기억될 선물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이기량(대구 수성구 만촌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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