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56년이 지났건만…돌아오지 않는 무명용사 13만명

#김점자(57·여)씨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를 불러본 기억이 없다. 사진 한 장 남지 않아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그녀가 돌이 갓 지난 아기였을 때 전쟁터로 떠난 아버지는 산화했고 전사통지서로 돌아왔다. '1953년 7월 14일 강원도 철원 금화지구 전사'라는 내용의 통지서 한 장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김씨가 일곱 살 되던 해 재가했고, 무남독녀인 터라 위로해줄 형제도 없었다. "참 슬펐죠. 서러워서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묘소라도 있으면 가서 실컷 울었을 텐데…."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낸 건 우연이었다. 휴일을 맞아 들른 국립현충원에서 아버지의 위패를 발견했다. 4일에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은 김씨는 아버지의 위패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녀가 백방으로 뛴 덕분에 무명용사였던 아버지는 '화랑무공훈장'도 받았다. 이제 남은 소원은 아버지의 유해를 찾는 일이다. 지난 3월 김씨는 6·25 전사자 신원확인을 위한 유가족 채혈을 한 뒤 유해 발굴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묘비를 세우는 게 평생의 꿈"이라고 했다.

#정전협정을 며칠 앞둔 1953년 7월, 박종근(61)씨 가족 앞으로 행방불명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육군 제15사단 38연대 소속이던 아버지는 속초 인근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했다. 행방불명 처리된 탓에 아버지의 위패도, 묘소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진정서를 낸 끝에 박씨는 아버지 위패를 서울 국립현충원에 겨우 모실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시간이 흘러 박씨가 입대한 부대도 15사단, 아버지와 같은 부대였다. 박씨의 두 아들도 모두 전방에서 군 복무를 마쳤기에 박씨의 집은 '병역이행 명문가'로 선정돼 병무청의 표창도 받았다. 박씨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우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온 가족이 군 복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다.

6·25가 끝난 지 56년, 하지만 전쟁의 격랑 속에서 아버지와 남편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유가족들의 눈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유해나 유품 하나라도 남아 있길 바라는 유족들의 바람은 간절하지만, 아직도 많은 유해가 가족을 찾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 산야에 남은 무명용사의 주검은 13만여 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2000년부터 6·25 참전 무명용사들의 유해를 발굴·감식해오다, 3년 전 유해발굴감시단이라는 국방부 직할 부대를 창설했다. 8년 넘게 수습한 유해는 3천317구(2009년 5월 말 현재)에 이른다. 하지만 유가족이 확인한 유해는 44구에 불과하다. 6·25세대가 고령화된 데다 유해 매장지가 훼손된 곳이 많고, 전사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직계 유가족들의 혈액샘플이 7천8명(5월 말 현재)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전몰군경유족회 대구시지부 관계자는 "각 기초자치단체 보건소에 가면 DNA 검사용 채혈이 가능하기 때문에 과거보다 유해를 찾을 확률이 높아졌다"며 "쉽진 않겠지만 정부의 대대적인 유해 발굴 작업이 이뤄지고 있어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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