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달빛 기행

지난 토요일 일이었다. 남편과 함께 늦은 저녁을 먹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보름달에 눈이 갔다. 달은 투명하리 만큼 맑아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마침 봉평에 메밀꽃이 활짝 피었다는 소식도 들은 터였다.

'달빛 아래 메밀꽃 보면 정말 기가 막힐 텐데…아깝다, 저 달빛!'

그냥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렸는데 순식간에 마음이 통한 우리는 덮어놓고 집을 나섰다. 십년 전 봉평 메밀꽃밭을 지나다가 달밤에 다시 한 번 오자던 약속을 이제야 지킨 것이다.

봉평 가는 길 내내 달은 온전히 우리 것이었다. 눈 가는 곳마다 달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식탁에서 달을 보고 있었는데, 한 시간도 안돼 예천에서 달을 보고 거기서 채 한 시간도 안돼 단양에서 달을 보고 있으니 거의 마법 같은 순간 이동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달과 메밀꽃이 빚어낼 환상적인 풍광을 미리 그리며 마음은 한없이 들떠 있었다.

그러나 우리 기대는 봉평에 도착하자마자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날부터 이효석 문화제를 시작해 곳곳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메밀밭 주위로 빼곡히 들어선 음식점과 설치물로 십년 전의 정취는 찾을 수 없었다.

소설 속에 나타난 달빛과 메밀꽃빛이 빚어내는 아름답고 몽환적인 밤은 더 이상 없었다. 각종 간판과 야시장 불빛의 간섭으로 달은 빛을 잃었고 더 외진 곳을 찾아 헤맸으나 그곳 또한 펜션에서 내뿜는 불빛이 먼저였다.

어쩌면 나는 아름다움에만 근접하려 했던 걸까. 먹을 것이 귀했던 산간 지방에서 거친 음식으로 배를 채웠던 비애가 메밀밭으로 남은 것인데 그 밭가에 다양한 삶의 모습이 북적거린다고 무얼 그리 실망하느냐, 말은 하면서도 아쉬움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봉평은 숨은 듯 드러나지 않고 조금은 불편하게 가 닿아야만 하는 곳이고 한밤중에 허기지듯 달려가 안기고 싶은 마음의 고향, 바로 소설 속 메밀꽃밭으로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구절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달빛은 여전히 맑았고 밤이슬에 촉촉이 젖은 메밀꽃은 안쓰러울 만큼 고왔다. 일곱 시간을 지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은 밀려드는 잠과 피로였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해마다 이맘때면 달과 메밀꽃이 만들어 내던 그 맑고 순한 빛만은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므로….

시인 박소유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