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그 바이러스 좀 퍼뜨려!

하춘수 대구은행장은 최근 화들짝 놀랐다. 다음달 은행 창립 42주년 기념일 때 직원들끼리 흥겹게 지내는 것보다 이웃을 돕는 기회를 마련, 은행 외부 사람들까지 모두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보자는 취지로 마련한 행사 진행 상황을 담당 부장으로부터 보고받고 나서다.

대구은행이 마련한 행사는 7일부터 이달 말까지 전 직원(3천90명)을 상대로 자발적 모금 캠페인을 벌인 뒤 모인 돈으로 쌀을 구입해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자는 것.

사실 은행 측은 직원 월급에서 일괄적으로 돈을 떼내는 '전통적'이고도 '손쉬운' 모금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 행장은 철저하게 자발적 동기에 의한 참여를 지시했다. 바로 옆의 직원도 알 수 없도록 기부 희망자가 직접 인터넷 클릭을 통해 신청하도록 한 것이다. 그 때문에 하 행장은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40년 가까이 숫자와 씨름해온 '계산의 달인' 은행장의 예측은 멋지게 빗나갔다. 모금 시작 며칠 만에 전체 직원의 70% 가까이가 참여, 2천200만원이 넘는 돈이 모였다. 이 돈이면 20㎏들이 쌀 560포대를 살 수 있다. 추석을 앞두고 어려운 이웃 560가구에 소중한 양식을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깜짝 놀랐습니다. 요즘 시대에 아무리 좋은 취지의 모금 행사라 해도 직원들에게 강제를 하기는 어렵거든요. 이런 행사가 있다고 인터넷에 공지만 했는데 많은 참여가 이뤄졌습니다. 직원들이 이 어려울 때 나눠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직원들에게 감동했습니다."

하 행장은 직원들을 다시 보게 됐다고 했다.

대구의 이른바 '끗발 있는' 한 행정기관. 이곳에 몸담고 있는 공무원들도 최근 어려운 결심을 했다. 열심히 노력해 받은 수천만원의 성과 인센티브를 모두 모은 뒤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써달라"며 기부를 해온 것이다.

"공무원 사회도 요즘 철저한 성과 평가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확실한 실적을 만들어낸 사람에게 물질적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돈이 개인의 주머니로 가는 것보다, 한턱내기용 저녁식사 값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에 쓰이는 게 맞습니다."

이곳 한 공무원은 "이런 의견이 의외로 쉽게 모아졌고 누구 하나 토를 다는 사람도 없었다"고 했다.

지난 며칠 동안 출입처를 다니면서 들은 얘기다.

얼마 전 지인 5명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 얘기를 들려줬다. 한 사람이 중간에 기자의 말을 낚아채며 이렇게 쏘아붙였다.

"대구에서 월급 제일 많이 받는다는 회사 직원들이, 월급 건너뛰는 일 없는 공무원들이 그 정도 선행은 당연히 해야되는 것 아니야?"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아니야. '스스로 했다는 것'에 의미를 둬야해. 지금까지 상당수 기부가 폼잡는 것이었잖아? 스스로 하는 기부를 바이러스처럼 퍼뜨려야해. 최 기자, 자네가 매일 써대는 기사의 소재도 되겠네. 기죽지 말고 그 얘기 많이 옮기고 다녀."

용기백배해 집으로 돌아가던 길, 대구의 가을밤은 아름다웠다.

최경철 정경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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