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사 정현주의 휴먼 토크] 미안하다! 하모니카야

지난 주말 지인의 전원주택에서 열린 바비큐 파티에 초대 받았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니 여름이 지나간 자리를 서둘러 채우는 성급한 가을이 여기저기서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정갈한 몇 채의 주택들이 마치 휴양지 리조트마냥 이국적이다. 초대받은 지인들이 평소에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믿음의 이웃사촌들이라 가을빛이 저무는 날, 반소매 상의가 조금은 쌀쌀하게 여겨지는 삽상한 공기 아래 그들과 나누는 담소는 천국의 언어마냥 정겹고 아름다웠다. 고기 굽는 냄새가 침샘을 자극하고 잔디위로 뛰어다니는 개와 고양이들이 전혀 귀찮게 여겨지지 않는 구월의 끝자락이 아쉬울 무렵, 모임의 리더격인 장형(長兄)이 만남을 마무리하면서 하모니카 연주에 조예가 깊은 한 분께 연주를 청하였다.

평소에 하모니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줄리어드 음대에서 유수한 악기는 다 가르쳐도 하모니카를 전공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음악적 소양이 미천한 나로서는 이런 유치한 잣대를 적용하면서 그 가치나 비중을 다른 악기에 비해 평가절하하고 있었다.

정경화나 장영주가 혼신을 다해 열정적으로 연주하던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우아해보여도 손톱에 때가 낀 초등학교 남학생들이 침을 튀기며 삑삑거리는 하모니카는 왠지 초라해보였다. 개구쟁이 남학생들이 끊어지는 단음으로 동요를 불어대던 그 하모니카를 전제덕이란 시각장애인이 연주하는 것을 듣고 새롭게 그 악기와 만나게 되었다. 삑삑거리던 한 뼘 크기의 자그마한 그 악기가 맑고 영롱한 음색을 내며 만들어 내는 감정의 크기와 깊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당장 전제덕의 CD를 구입하여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익숙한 멜로디지만 하모니카와 천재 연주자가 어우러져 그려내는 유려한 호흡이 이전에 내가 알고 있는 노래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 곡들을 재탄생시키고 있었다.

그 하모니카를 이 아름다운 가을밤에 귀한 사람들과 함께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황홀하였다. 하모니카는 끊어지는 음을 가진 삑삑이라는 인식에서 들숨과 날숨이 빚어내는 유장하고 서정적인 악기로 내 사고에 분류코드가 바뀔 무렵이었으니 아마추어 경지를 넘어선 지인의 절묘한 연주는 더욱 감동적이였다. '광화문 연가'가 쓸쓸하고 애잔하게 연주되고 있다. 실내가 아니라서 소리가 분산되어 공연장으로는 아쉬운 듯 했으나 오히려 나지막이 사방으로 끝없이 퍼져가는 가락이 실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애틋함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울리고 있었다.

어느덧 어두워진 가을밤 사이로 외롭고 처연하게 울려 퍼지는 하모니카의 감미로운 연주는 듣는 우리들을 즐거운 고독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하모니카야말로 가을과 너무 잘 어울리는 청승맞은 (?)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광화문 연가의 가사처럼 오늘 우리가 함께한 유한한 시간은 '세월 따라 흔적 없이 변하지만' 오늘 우리가 하모니카 연주와 함께 한 추억은 광화문 언덕 밑 정든 길처럼 남아 있어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다시 찾을 수' 있는 영원한 보석이 될 것이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예를 갖추어 하모니카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하모니카야!" 이렇듯 우리를 감동시킨 하모니카의 진가를 모르고 삑삑이쯤으로 인식한 나의 무지를 진심으로 사과했다.

053)253-0707 www.gounm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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