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느낌이 완연한 10월의 끝자락, 안동 김씨 동성마을인 소산으로 가는 길은 색색의 단풍과 황금빛 물결이 넘실거렸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을 찾는 것처럼 따뜻하고 편안한 길을 따라 안동 김씨 종가 양소당을 찾았다. 안동 김씨 동성마을 소산에는 본과 성씨가 같으면서도 시조를 달리하는 두 안동 김씨가 함께 살고 있다. 고려시대 명장이며 정치가인 김방경(1212~1300)을 시조로 하고 있는 선안동 김씨의 종가는 삼소재이고 고려 개국 공신으로 태조로부터 사성(賜姓)과 함께 태사(太師)라는 칭호를 받은 김선평을 시조로 하고 있는 후안동 김씨의 종가는 양소당(養素堂)이다.
◆검소하고 신의를 중시
오늘 우리는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후안동 김씨(安東 金氏) 종가인 양소당 종부(宗婦) 현경자(玄敬子)여사를 찾았다. 양소당은 후안동 김씨의 종가로 흔히 안동 김씨라고 하면 이 후안동 김씨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 후안동 김씨를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3斗)'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관자는 조선조 때 정 3품 이상의 고관(高官)들의 망건줄에 달던 옥(玉)과 금고리를 뜻하는 것으로 안동 김씨는 그만큼 많은 현관(顯官)을 배출시켰다는 것이다.
양소당은 약 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여느 동성마을처럼 양소당도 마을 가장 안쪽 나지막한 구릉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종가가 있는 곳은 명당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대체로 종가는 주산(主山)이 끝나는 낮은 구릉에 자리하여 앞으로는 하천을 바라보고 있다. 굳이 풍수를 논하지 않더라도 양소당은 소산을 굽어보고 있다.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넓은 풍산들이 펼쳐져 있고 마을의 곳곳과 연결되어 있어 그 운치를 더한다.
◆서울서 대종가의 종부로
지난 1977년, 대학교 학장 비서실에 근무하던 서울깍쟁이는 안동 김씨 종손을 만나 신식 결혼식을 치르고 대종가의 종부가 됐다.
처음 시댁으로 오던 날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손을 꼭 잡으며 "고맙고 반갑다. 부디 이 집을 잘 지켜다오"라며 간곡하게 부탁하셨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종부는 충분히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종부가 된 지금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왜 그런 말씀을 처음 시집 온 새색시에게 하셨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단다.
종손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관계로 결혼 후 계속 서울에서 생활했지만 기제사 일곱 번, 불천위제 한 번, 시제 다섯 번 등 연간 열세 차례에 이르는 제사를 치르고 서울로 오르내리는 길이 만만치만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제사를 지내고 난 후 먹는 제삿밥은 아주 맛있었고 아직도 처음 시집와서 먹었던 첫 제삿밥의 맛은 잊을 수 없는 '꿀맛'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종부가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당사주를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사주보는 이가 종부더러 "나이 먹어서는 다른 사람 대접하며 살고, 대문이 아주 큰 집으로 시집을 가겠다"고 했단다. 처음 시집 왔을 때는 그 얘기가 뭔지도 몰랐는데 대문이 아주 큰 집도, 다른 사람 대접하며 사는 삶도, 종부의 삶이 그러하니 어쩌면 그렇게 딱 맞히었냐며 웃어 보이신다. 그리고 어떠한 삶이든 "갈등의 기간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하신단다. 그 갈등의 기간을 거친 후 주어지는 삶이야말로 진정 가치있는 삶이고 그래서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고맙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계신다.
◆ 시집온 지 4년 만에 시할머니 3년상
종부의 삶 가운데 가장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여쭈었다. 종부는 수줍게 웃어 보이며 "너무 무섭고 힘들었던 시할머니의 3년상이었다"며 혼인 후 4년 만에 돌아가신 시할머니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워낙 아들이 귀한 집이다 보니 손자며느리를 누구보다 예뻐하시던 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안동으로 내려와 상례를 지내는데 눈물은 넘쳐흐르는데도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곡을 하는 게 그렇게 힘드셨다고 하신다.
상례가 끝난 후 서울 아파트에 빈소를 차려놓고 시할머니의 3년상을 치르게 된다. 아파트에 빈소를 차리고 매 끼니 새 밥에 국, 삼찬을 해 내는 일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무서웠던 것은 돌아가신 분의 영정과 옷가지, 그리고 늘 피워져 있던 향이었다.
종손이 업무로 바빠 늦을 때면 당시 세 살이던 아들을 꼭 안고 두려움을 이겼는데 하루는 친정아버지께서 아들을 봐 주시겠노라 하시며 데려가고 종손은 늦으니 무서운 마음을 없애려고 큰 소리로 빨래를 계속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시할머니가 답답하다고 문을 두드리시는 것 같아서 친정으로 도망치다시피 가신 날도 있으시단다.
종부는 이제 내년이면 며느리를 맞게 된다. 종부처럼 서울 아가씨이고 퍽이나 마음에 든다고 하시면서도 며느리가 또 지게 될 '종부'라는 이름이 혹여나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한다.
앞으로 제사도 시대 변화에 맞춰 이어나갈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도 가지고 있다. 12년 전 종손과 종부는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안동으로 내려왔다. 종가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문중 어르신들의 말씀과 언젠가는 안동으로 내려와 종가를 지킬 것이라는 종손의 결심 때문이었다.
이제 양소당은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일상에서의 지친 마음을 쉴 수 있는, 따뜻함을 전해주는 전통체험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종부의 솜씨 때문인지 집안 곳곳에는 예쁜 꽃병이 놓여져 있고 잘 가꾸어진 잔디밭에는 예쁜 흔들 그네도 있다. "우리집을 찾으시는 분들 한 분, 한 분 정말 배울 것들이 너무 많아요. 꼭 다음에 다시 와요"라며 웃으시는 종부의 환한 얼굴이 국화꽃과 닮아있다.
(재)안동축제관광조직위 김은정 vkehdi@hanmail.net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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