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권씨(醴泉權氏)는 약 700여년 전 고려 충목왕 때의 예천지방의 3대 토성(土姓)중의 하나인 '흔'(昕)씨였다. 시조 흔적신(昕迪臣)은 고려중엽 보승별장을 지냈으며 안동권씨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3세 흔수창(昕壽昌)과 5세 흔승조(昕昇朝)도 안동 권씨 집안으로 장가를 갔으며 흔씨의 선대는 예천지방의 호족으로 호장을 세습했다.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한 6세 흔섬(昕暹)대에 이르러 고려 29대 충목왕이 등극했는데 충목왕의 이름이 바로 흔(昕)이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왕의 이름을 다른 사람이 쓰지 못하게 하는 관례가 있기에 국명에 의해 흔(昕)씨도 성(姓)을 바꿔야만 했다. 이에 흔섬은 어머니의 성(姓)이자 흔씨 1세, 3세의 처가 성(性)이기도 한 권(權)을 새로운 성으로 정해 권섬(權暹)이라 하고 본관은 시조의 세거지인 예천(醴泉)으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예천 권씨로 불려 왔다.
예천 권씨 문중 인물 가운데 4세손 권맹손(權孟孫)은 고려 공민왕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당시의 문장가로 '대동시림'을 남겨 가문을 빛냈으며 5세손 권선(權善)은 권오행(權五行), 권오기(權五紀), 권오복(權五福), 권오륜(權五倫), 권오상(權五常) 5형제를 두었는데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예천 권씨 집안을 '오복문'(五福門)이라 불렀다.
권오복은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권오복은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아 조선 성종17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에 뽑혔다. 그의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부귀공명에 연연하지 않은 대쪽 같은 선비의 기개는 8세손 권문해(權文海)에게 이어졌다. 권문해는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영남학파의 주류로 예천 권씨의 명성을 일으켰다.
특히 그가 대구 목사로 있을 때 단군 이래 조선 선조 때 까지의 우리역사와 문화예술풍속 등을 총망라해 107가지 운으로 분류 저술한 '대동운부군옥'(보물878호) 전20권을 편찬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오늘날 목판본 677매만 전해지고 있다. 안동'엄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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