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국, 그리고 나]호주 서부 '퍼스'

뽀얀 햇살 아래 남태평양 푸른 바다 '넘실'

몇 년 전 '50대 엄마와 30대 딸의 배낭여행기'를 기획한 적이 있다. 여행지는 오리지널-클래식-퓨어 배낭여행지로 통하는 태국, 베트남 등의 동남아 3개월 코스. 이미 10년 넘게 '딴 솥밥'을 먹으며 어느새 각자 갱년기, 노처녀기로 돌입해버린 모녀가 함께 진짜 쌀부대 같은 배낭을 메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고 현지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3개월 동안 '찐하게' 산전수전공중전을 겪어보면 어떨까. 내 계획을 들은 친구는 그 흔한 사이판 리조트 여행 한 번 보내드리지도 않고 젊은 학생들도 고생바가지를 '버거지'로 쓸 것임에 분명한 험한 배낭여행에 어머니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성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어머니는 해외 여행은커녕 딱 한 번 제주도행 말고는 비행기도 제대로 안 타본 분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난 10여 년 동안 나 혼자 맛 본 내 인생 최고의 달콤한 사과를 그 누구보다 어머니와 나눠먹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이었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어머니 품을 떠나 내 멋대로 살았던 10여 년간의 성장기를 어머니께 멋지게 보고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녀가 몹시 좋아할 것을 상상하니 예전의 그 어느 여행보다도 가슴이 설렌다. 나는 나의 원대한 포부를 출판사에 보낼 여행기 기획서로 멋지게 꾸며 어머니께 보여드렸다.

"태국의 게스트하우스에는 빈대나 벼룩 없니?"

기획서를 한참 읽고 난 어머니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나는 적어도 '옷은 뭐 입고 갈까? 배낭은 어디서 살까?' 같은 질문을 하실 줄 알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태국 게스트하우스들도 옛날 같지 않게 깨끗하며 현지버스 여행도 걱정되는 것보단 힘들지 않을 것임을 애써 설득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마치 자신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는 무자비한 딸을 앞에 둔 듯 공포 서린 눈빛으로 내 눈치를 보셨다. 결국 기획서는 폐기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나의 원대한 계획은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한 이유로 실행되었다. 우리는 갑자기 꾸린 커다란 배낭을 메고 호주행 비행기에 함께 타고 있었다. 전날 받은 충격적인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여행을 하고 있는 막내 동생의 사고 소식이었다. 동생이 운전한 차가 중앙선을 넘어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와 크게 부딪쳤으며, 양쪽 다 크게 다쳐 입원 중이라는 것이다. 우리 가족 모두 정신이 아득해졌고, 그날 바로 급히 어머니의 여권을 만들었으며, 모녀는 대사관에서 알려준 병원 주소 하나만 들고 호주 서부의 '퍼스'라는 도시로 날아가게 된 것이다.

우리의 온갖 끔찍한 상상에 비하면 동생의 상태는 양호했다. 하지만 한 쪽 발가락이 부서진 녀석은 꼼짝도 못하고 깁스를 한 채 낯선 나라의 외로운 병실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제야 모녀는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우리는 단지 동생의 엄청난 병원비를 해결해야 하며 동생이 피해자이기 때문에 '한국식으로' 합의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돈만 왕창 갖고 호주 땅에 착륙한 상태였다. 그러나 호주는 놀라운 나라였다. 병원비는 병원과 보험사 사이의 문제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고, 병원의 상담사가 직접 변호사를 소개해 주었으며, 변호사는 자신이 직접 경찰이랑 얘기할 테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고 했으며, 병원 측은 병실 가까운 곳에 작은 숙소까지 마련해주었다. 모두들 아무 것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나라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한국인 가족을 위로하고 도와주었다. 정말 약자에 대한 '소셜 시스템'이 훌륭한 나라다. 우리는 할 일이 없었다.

동생은 수술을 받기 위해 좀 더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 우리는 퍼스 시내의 유스호스텔로 숙소를 옮겼다. 병원에서 며칠을 지새운 탓에 몸도 마음도 지친 모녀는 커다란 배낭을 낯선 방안에 내려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비로소 당신이 태어나 처음으로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12시간을 날아왔다는 것을, 평생 해외여행 한 번 꿈꿔본 적 없는 당신이 호주라는 낯선 나라의 여행자가 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녀가 갑자기 내 팔뚝을 꼬옥 붙들었다. 나는 마음이 울컥했다. 한참이 지난 후 아침에 먹다 남긴 밥을 배낭에 쑤셔 넣어둔 게 생각났다.

"엄마, 제가 볶음밥 만들어 드릴게요."

"그래, 한국에서는 내가 네 엄마지만 여기선 네가 내 엄마 해라."

유스호스텔 부엌에서 찾아낸 온갖 소스와 양념을 쳐서 볶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볶음밥이 완성되었다. 다국적 배낭여행자들로 북적거리는 유스호스텔 부엌의 작은 테이블에 며칠간 씻지도 않은 꼬질꼬질한 모녀가 밥 한 접시를 두고 마주앉았다. 어머니는 낯선 집에 맡겨진 아이처럼 웅크리고 한 접시를 뚝딱 드셨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거리의 캥거루 조각상들을 배경으로, 햇살 뽀얀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반듯반듯한 쇼핑가와 컬러풀한 시내버스를 배경으로 어머니의 사진을 찍어드렸다. 동생에 대한 걱정, 낯선 나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생전 처음 해외 땅을 밟아보는 설핏한 설렘이 뒤섞인 어머니의 표정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이국의 싱싱한 겨울풍경 위에 어색하게 겹쳐졌다. 나는 동생이 완치되고 나면 꼭 한 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멋진 여행을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몇 달 후 동생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건강이 나빠지셔서 비행기 탑승이 금지되었다. 모녀의 멋진 여행 계획은 아직도 계획으로만 남아있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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