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를 타고 대구서 부산으로 가자면 '경주터널'을 통과한다. 그럴 때 대부분은 자신이 지금 어떤 산줄기를 지나는지 모른다. 그냥 차에 얹혀 갈 뿐이다. 그래서는 여행이 무미하다.
그 터널 위 산줄기는 진행 방향 오른쪽(서편)으로 솟아 '오봉산'(五峯山)을 이룬다. 그 위에는 '부산성'(富山城)이 있다. 산의 동쪽 비탈, 즉 진행 방향 바로 전면(남쪽)은 삼국유사의 현장 '여근곡'(女根谷)이다. 무심히 지나치기 아까운 곳이다.
터널 위 산줄기를 타고 부산성에 오른다면 동편으로 아화서 건천에 이르는 넓은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거길 거치지 않고는 경주로 들어갈 수 없는 땅, 명실상부한 옛 서라벌의 관문이다. 서편에 있는 대구·영천·경산·청도 등등에서 동편의 경주로 갈 때 거쳐야 하는 첫 땅이 바로 거기인 것이다.
저 땅이 이렇게 목이 되는 것도 낙동정맥 때문이다. 그 동·서 지역 사이에 낙동정맥이 버티고 서서 둘을 갈라붙이는 것이다. 이런 지세에서는 어떤 군사도 그 너머 땅을 쉽게 넘보기 어렵다. 큰 부대가 넘어가려면 엄청난 양의 물자 이동이 수반돼야 하지만 산줄기가 그걸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낙동정맥은 그야말로 신라(경주)의 천혜 방어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연 방어벽도 잠시 몸을 낮춰 통행을 허용하는 구간이 있으니, '당고개' '지경재'가 대표적이다. 이것만 넘으면 경주로 갈 수 있고, 경주로 가려면 그걸 넘지 않을 수 없는 고개라는 말이다. 그걸 넘어 처음 거치는 곳이 아화-건천이다.
'당고개'는 부산(富山)을 거친 정맥이 경주 건천과 산내를 가르며 내려서는 곳이다. 높이래야 불과 315m쯤. 병풍산 이후 해발 460m 정도의 '독구불재'로 떨어졌다가 651m봉으로 마지막 솟은 후 200여m 추락하는 것이다. 때문에 낙동정맥도 이 재를 경계로 북편의 부산-병풍산 덩어리와 남쪽 단석산 덩어리로 나뉜다.
당고개는, 남북 간은 그렇게 단절시키지만 동서 간에는 반대로 연결성을 높인다. 동편의 건천과 서편의 산내가 아주 완만한 비탈을 통해 자연스레 이어지는 것이다. 거길 통하면 청도-창녕-합천권과 경주가 쉽게 하나 된다. 창녕까지 거리가 80여㎞밖에 안 됨을 알리고 서 있는 이정표가 그 증거다. 신라가 청도로 서진해 이서국을 먹고 가야권 초입 창녕으로 진격한 통로도 이것이었을 터다.
이렇게 중요한 지형인데도 고개 이름조차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당고개'라고도 하고 '땅고개'라고도 했다. 그런 착종은 현장에서 더 여실해, 현지 국립공원 표지는 '당고개'라 하는데 인접 소공원 및 휴게소에는 '땅고개'라 씌어 있다. 재 서편 고개 밑 산내면 감산1리 감존마을 어르신도 "당고개인지 땅고개인지 주민들도 헛갈린다"고 했다.
하지만 재 동편 첫 마을인 건천읍 송선2리 우중골마을 어르신은 "그 너머 산내 쪽에 옛날 당집이 있었다"며 "당고개란 이름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산내면 지명유래지도 당집이 있었다는 증언을 싣고 있다. 당고개가 옳은 이름임을 암시하는 간접 증거들이다. 산내면 지명 유래지는 그러면서, 이 고개를 '우중골티' 혹은 '우중곡치'(雨中谷峙)라고도 불렀다고 병기하고 있다.
앞서 살핀 바 있는 지경재는 이 당고개보다 더 낮다. 그 높이는 기껏 해발 100여m다. 합천을 통해 신라 땅을 넘봤던 백제나 후백제가 대구를 거쳐 접근하기 가장 좋던 길목이다. 팔공산 기슭 대구 해안동 일대서 벌어졌을 '동수대전'(桐藪大戰·927년)을 통해 고려군을 초토화시켰던 후백제 견훤 군대가 서라벌을 유린하러 왕래했던 통로 또한 이것일 터이다.
한국전쟁 초기이던 1950년 9월에는 북한군도 지경재를 주요 통로로 주목했다. 아군의 팔공기맥 최후 저지선을 뚫고 영천으로 침공해 다음 진격 목표를 경주로 택한 뒤의 일이다. 국운을 건 사투가 지경재 인접 임포리 일대서 펼쳐지고 재 남쪽 사룡산 지구가 치열한 전장이 된 연유가 이것이었다.
부산성 일대는 저렇게 중요한 지경재와 당고개 모두를 한꺼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관망대다. 저 아래 세상 감시하기에 좋고, 그곳으로 정찰·유격하러 다니기에 최상의 거점이라는 말이다.
거기다 성안은 매우 넓어 많은 군사를 둘 수 있다. 성의 실제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내 지구에 사유지임을 알리며 서 있는 경고판에는 그 넓이가 100만평이라고 씌어 있을 정도다. 성의 둘레를 놓고 현지 안내문은 7.5㎞, 다른 자료는 약 5㎞(4,977m)라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성내엔 20여 호 되는 마을과 초등학교 분교가 있었을 정도라 했다. 1970년대 철거할 때 명목은 목장 조성이었지만 지금 그 넓은 경사지는 밭으로 변해 있다. 그 아래 송선리 어르신들은 사적지가 개인 소유로 넘어간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부산성은 문무왕 3년이던 서기 663년 정월에 착공, 3년 만에 완공했다. 신라 도성의 안전 강화가 목적이었을 것이라 했다. 역사를 봐도 수긍할만한 관측이다.
이 성을 쌓기 전인 서기 600년대는 신라와 백제-고구려 간 알력이 피크에 달한 쟁투기였다. 신라는 그에 앞선 24대 진흥왕(540~576, 이하 재위 기준) 때 급팽창했다. 562년에 대가야를 복속한 게 예다. 새로 넓힌 창녕·서울 등의 땅에다 비를 세운 것도 그때다. 쟁투가 심해진 건 그런 팽창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제 알력이 극심했던 것은 신라 26대 진평왕, 27대 선덕여왕 때였다. 진흥왕의 장손으로서 53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던 진평왕(579~632)은 고구려가 두려워 수나라를 불러들였다. 그의 딸인 선덕여왕(632~647) 때는 당나라에 열심히 따라 붙어야 했다. 여왕의 생질인 29대 태종무열왕(654~661)이 당나라 힘을 빌려 서기 660년 백제를 소멸시키고야 이런 상황은 해소됐다.
부산성 현지 안내판에는 선덕여왕 때(636년) 백제군이 오봉산 여근곡까지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해 성을 쌓았다고 써 놨다. 하지만 부산성은 백제 멸망 이후에 착공하고 여근곡 사건 30년 뒤에야 완공했으니 어쩐지 좀 거리감이 생긴다.
그때의 전설로 유명해진 '여근곡'은 성벽 바로 아래 있는 크잖은 골이다. 그 주위로는 산줄기가 둥그렇게 둘러쌌다. 오봉산 정상 동편 성벽 구간 지릉의 566m봉으로부터 내려 온 산줄기가 둘로 나뉜 뒤 원같이 둘러싸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두 산줄기의 복판으로도 두둑하게 언덕이 생겨 오른다. 지난 회 게재한 '산경도5'에 그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곳 마을 어르신은 이 산줄기를 '소산', 그 사이 골을 여근곡이라 부른다고 일러줬다. '소산'이란 이름은, 그 외곽에 또 하나의 둥그런 산줄기 흐름이 형성되는 바 그 보다 작은 것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인가 싶었다. 여근곡 골짜기에서는 샘이 솟아 예부터 '소산지'라 한다 했다. 지금은 그 아래 저수지가 그 이름으로 불리지만 근세에 만든 것일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렇지만 지도들이 가리키는 소산은 다른 것이다. 1대5,000 지형도는 여근곡 서편의 또 다른 산줄기 위 512m봉에다 그 이름을 붙여 놨다. 반면 1대25,000 지형도는 같은 산줄기의 한참 아래에 있는 185m봉을 지목했다. 혼란이 심하다.
여근곡 아래쪽 땅 이름 표기도 검토가 필요해 보였다. 건천읍 신평리에 속하는 그 일대 들과 마을을 현지 어르신은 '섭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1대5,000 지형도에는 '샘들'로 나타난다.
섭들서는 닭벼슬 같은 오봉산의 다섯 봉우리 모습도 쉽게 살펴진다. 둘이 그만큼 가깝다는 뜻이다. 마을과 정상 사이에 근래 등산로가 개설돼, 주사암까지도 얼마 안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여근곡은 오후에는 제대로 분별하기 어렵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산 아래서 볼 때 역광(逆光)이 되기 때문이다.
워낙 저명한 곳이다 보니 부산성엔 선덕여왕의 여근곡 이야기 외에 또 다른 설화들도 얽혀 있다. '덜자구야 다자구야' 이야기도 그 하나다. 다시 침공해 온 백제군이 할머니 첩자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 아들 이름이라 사칭케 하고는 덜자구 다자구를 부르며 신라군이 다 자는지 덜 자는지 신호토록 했다는 게 그 내용이다. 그러나 그 시점은 무열왕 즉위년인 서기 654년으로, 그 또한 성이 착공되기 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는 소백산 죽령(竹嶺) 산신 신화에도 똑같이 나타나는 등 일반적인 설화일 뿐이다.
부산성에는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枝朗歌) 설화도 걸려 있다. 죽지랑은 김유신 장군의 참모로 많은 전투에 참가했고 훗날 수상 직에까지 오른 왕족이다. 노래를 지은 '득오'란 사람은 죽지랑이 화랑일 때 낭도였다가 문득 부산성 군인으로 징발되는 곡절을 겪은 사람이다. 노래의 내용은 그런 여러 경우에서 자신을 걱정해주고 이끌어주던 은인을 그리워하는 것이라 한다. 이 에피소드는 성이 완성되고 난 후인 효소왕 때 일이라니 연대로는 일단 맞아 들어가는 셈이다.
글·박종봉 편집위원
사진·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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