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실 전등이 꺼지고 모니터 불빛만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모니터에 비치는 영상은 흑백의 점과 선들로 가득하다. 초음파를 통해 들여다보는 인체 내부는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기묘한 형상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는 의사는 마치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거대한 동굴 속을 누비는 탐험가처럼 긴장한 빛이 역력하다.
이미 수만번은 들여다봤을 인체 내부. 하지만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 미세한 차이가 질병 유무와 질환 부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똑같은 화면을 본다고 해서 어느 의사나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십년간 축적된 임상 경험과 꾸준한 연구가 뒷받침돼야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전국 유일 초음파 전문의원
전국에서 유일하게 초음파를 전문으로 하는 영상의학과의원이 대구에 있다. 바로 김정식 영상의학과의원이다. X-선에서 시작된 영상의학은 한때 진단방사선과로 불렸지만 지금은 MRI, CT, 초음파 등을 아우르는 영상의학과로 불린다.
계명대 동산병원에서 영상의학과 교수로 12년간 재직한 김정식(53) 원장은 2000년 개원했다. 처음 초음파 전문의원을 열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모두 "미쳤다"고 했다. 첨단 영상의학 장비들이 쏟아지는데 초음파로 무슨 '장사'가 되겠느냐고 손가락질했다. "적어도 태아정밀초음파만큼은 경쟁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대학병원에 있을 때에도 많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저를 믿고 산모를 보냈습니다. 이들에 대한 믿음 때문에 최소한 밥을 굶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이곳 의원을 찾는 환자 중 대부분은 다른 병원에서 초음파 검진을 의뢰한 경우다. 지금은 대부분 산부인과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태아정밀초음파를 하지만 여전히 진단이 쉽지 않은 특이 사례는 대학병원에서도 그에게 검진을 의뢰하고 있다. 그만큼 김 원장은 '의사가 믿는 의사'가 됐다는 말이다. 갑상선암 진단에서도 탁월하다. 이미 7년 전 3㎜ 크기의 갑상선 암 조직을 초음파로 찾아내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진단이 보편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의뢰한 대학 병원이 놀랄 정도였다.
◆고마운 기억과 안타까운 기억
개원 후 이듬해 찾아온 한 환자를 그는 잊지 못한다. 43세 남자 환자는 쓸개에 1.4㎝ 혹이 있었다. 암이라는 소견을 적어 한 대학병원에 보냈고,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떼어낸 혹을 병리과에 보냈더니 암이 아니라는 판정이 나왔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도 '그럴 리가 없는데'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됐던 가슴을 쓸어내린 환자는 일단 퇴원했다.
그런데 2년6개월 뒤 그 환자가 다시 찾아왔다. 배가 아프다는 것. 이번에는 간 아래 장간막에 엄지손가락 크기만한 혹이 보였다. 일단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제거수술을 받았고, 혹을 검사해보니 예전에 쓸개에서 떼어낸 것과 같은 조직이었다. 암이었다. 뒤늦게 알고 보니 쓸개에 있던 암이 전이됐던 것. "대학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았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다시 병을 앓고나니 암이라는 겁니다. 건강검진에서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제게 검사를 받고는 암이 발견됐던 것이죠."
이후로 그 환자는 김 원장에게 3~6개월마다 한번씩 초음파 검진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19차례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7년이 넘도록 별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정확한 검진에 감사하며 돌아가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드물게 있다. 선천성 심장판막증을 찾아내지 못했다며 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태아정밀초음파는 대개 임신 20주와 30주에 두번 합니다. 20주 검사시 이상이 없으면 30주에도 별 이상이 없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심장판막증은 20주에 진단이 어렵습니다. 정상처럼 보이죠."
이곳에서 검진을 받은 한 부부는 아이가 태어난 뒤 심장판막증 진단을 받았다며 "책임지라"고 아우성을 쳤다. 김 원장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검진 당시 찍은 초음파 사진도 주면서 다른 곳에서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만약 잘못이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던 그 부부는 이후 소식이 없었다. 김 원장은 반드시 환자에게 초음파로 검진 가능한 질환과 그렇지 않은 질환을 설명한다.
◆쓸데없는 일은 없다
지금은 환자들이 인정하는 초음파의 대가가 됐지만 초기만 해도 말 못할 설움도 많았다. 처음 대학병원에 교수로 갔을 때만 해도 다른 과 의사들에게 "잘 해줄테니 환자를 보내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행여 환자들에게 병명을 묻거나 검사 후 소견이라도 말할라치면 원로 교수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왜 내 환자에게 함부로 말하느냐. 내가 주치의인데 건방지다." 지금은 전혀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영상의학은 그저 임상 분야를 지원하는 정도로 여겼다.
"대학병원에 있던 초창기에 한번은 산부인과 한 교수님이 불임치료를 받는 여성 환자들의 난포 크기를 순서대로 측정해 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초음파로 난소 찾기도 어려운데 난포 크기를 측정하는 것은 정말 큰 스트레스였죠." 매일 5~10명씩 환자를 보며 난소를 찾는데 2년 이상 노력을 기울였다. 그쯤 되니 초음파만 갖다대면 난소가 보일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 처음에는 쓸데없는 일을 시킨다며 푸념하고 원망도 많이 했다. "세상에 쓸데없는 일은 없더군요. 그때 노력들이 드디어 빛을 봤습니다."
김 원장이 쓴 주요 논문은 대부분 난소와 관련된 것이다. 난소에 생긴 물혹과 그 옆에 생긴 물혹을 초음파로 진단할 수 있다는 내용과 난소 수술 후 유착에 의해 생기는 염증성 물혹 등을 초음파로 구분해 내는 방법 등은 그가 처음 발견한 것. 미국 영상의학 관련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환자의 아픔을 미리 아는 의사
'초음파는 다른 첨단장비에 비해 진단 능력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 원장은 손사래를 치며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가령 제가 주로 보는 태아정밀초음파의 경우, MRI나 CT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기가 움직이기 때문이죠. 갑상선, 유방, 인대 등 피하조직을 진단하는 능력에서도 초음파가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초음파만으로 특화한 영상의학과 개인의원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정지된 사진을 촬영하는 MRI, CT와 달리 초음파는 의사와 환자와의 교감이 중요하다. 그저 배가 아파서 온 환자라도 아픈 부위와 시기, 통증 양상 등에 따라 어떻게 검진해야 할지, 어떤 부위를 집중적으로 봐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만큼 초음파는 의사의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진단장비입니다. 찍어놓은 사진을 보고 판독하는 능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병을 찾아내는 장비입니다. 그래서 더욱 매력이 있죠." 그는 자신을 믿고 의뢰해주는 임상 의사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궁금증을 적극 해결해주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울러 환자들의 아픔을 누구 보다 먼저 알아줄 수 있는 의사가 되겠다고 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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