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작 영화 리뷰] 시

무너지는 마음의 기둥 붙잡으려, 그녀는 시를 쓴다

'시를 쓴다는 것은/깊은 밤 잠 깨어 홀로임에 울어보는/무너져 가는 마음의 기둥/꼿꼿이 세우려/참하고 단단한 주춧돌 하나 만드는 일이다/허허한 창 모서리/혼신의 힘으로 버틴/밤새워 흔들리는 그 것, 잠재우는 일이다'-'시를 쓴다는 것'(조영혜)

미자(윤정희)가 그랬다. 어느 날 마음의 기둥이 무너지고, 기억까지 흩어져가는 가운데 혼신의 힘으로 시를 부여잡으려고 한다.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작품 '시'는 시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영화다. 묵직한 주제 의식이 있어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전작들에 비해 운율이 자연스럽고 격하지 않아 사뭇 아름답기까지 한 영화다.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의 어느 작은 도시. 홀로 손자를 키우는 60대 중반의 미자는 중풍에 걸린 강노인(김희라)의 간병인 일을 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그러나 아직도 꽃을 좋아하고 고운 옷 입기를 좋아하는 소녀 같은 할머니다.

우연히 전단을 보고 동네 문화원의 시 강좌를 찾는다. "시는 느끼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에 처음으로 사물들을 찬찬히 보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소녀의 죽음에 손자가 관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자의 생활은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삶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는 피를 머금는 창작의 고통과 그렇게 피어난 꽃 같은 시의 상반된 이미지처럼 두 개의 이야기가 한 타래로 흐른다. 60대 여성이 처음으로 시를 쓴다는 예쁜 상황과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자살한 소녀의 아프고 힘든 상황이 시를 쓰는 과정에서 녹아든다.

시는 그동안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일이다. 그러나 시처럼 사물을 느끼려고 하지만 그 사물들은 이미 썩은 사과가 되었다. 밤새워 불어대는 바람에 내가 흔들리는 것이다.

'시'는 윤정희씨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극중 미자는 꿈꾸는 할머니 캐릭터다. 60대 중반이지만 여전히 여고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힘들 때 노래방에서 목청껏 노래 한 곡 부르면 모든 것이 풀리는 단순한 할머니다. 자살한 소녀의 엄마를 설득하러 가면서도 하늘거리는 치마에 모자로 치장하고 길을 나서니 대책이 없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기초생활 대상자면서 딸에게 손을 벌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윤정희 씨는 강온의 양면을 가진 캐릭터를 절제와 절절함이 섞인 연기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16년간의 공백을 내공으로 묻어버린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한 듯하지만, 차츰 지나면서 미자에게 쏙 빠져들게 된다.

특히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흐느낌이나, 식당 마당에서 쪼그리고 앉아 엉엉 우는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미치도록 공감하게 한다.

'시'는 오프닝과 엔딩이 인상적이다. 소녀의 주검이 떠내려 오는 강의 오프닝과 세상의 기억을 삼키고 흘러가는 강물의 엔딩이 하나가 되면서 감독의 메시지를 연결된 이미지로 담아낸다.

한 글자인 제목만큼 흐름도 간결하고 자연스럽다. 그렇게 아끼던 손자를 경찰차에 태워 보내고 미자가 배드민턴을 치는 여름밤의 이미지도 좋다. 대사 없이 배드민턴의 경쾌한 소리가 나트륨등 아래에서 무심한 듯하지만,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시'에는 김용택 시인이 직접 등장하는 등 시 동인들의 일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 하면 야한 농담을 하는 느글느글한 사람이 있고 창 넓은 모자를 쓴 여성과 "시 같은 건 죽어도 싸!"라는 술 취한 독설가가 있기 마련이다. 영화는 그들의 고민과 표정들을 술자리나 시낭송회 등을 통해 잘 그려낸다.

포스터의 '시'란 제목은 감독의 친필이다. 세 번의 획을 간결하면서도 견고하게 그었다. 짧지만 굵은 순간은 시를 접한 미자의 뜨거운 순간과도 닮아 있고,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등의 영화를 통해 삶 또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권고했던 감독의 통찰도 그대로 묻어난다.

마지막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떠나는 순간이며 다음 생을 꿈꾼다'는 내용을 담은 미자의 '시'는 큰 울림을 준다. '시'는 올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상영 시간은 2시간19분이다. 5월 13일 개봉예정. 15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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