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전방위 독립운동가 여운형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1886년 오늘 소론계열 양반집 넷째아들로 태어난 몽양(夢陽) 여운형은 일찍이 신문화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구시대적인 집안 노비들을 해방시켰고 국권을 잃자 중국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유학시절 중국 국민당수 쑨원과 교제했고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 독립의 기치를 올렸다.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고 이광수 등을 일본에 보내 2·28독립선언에 직간접 영향을 줌으로써 3·1운동의 불씨를 제공했다.

임정(臨政)에선 의정원 의원과 외무부차장을 지냈다. 독립을 위해 국제공산당(코뮌테른)과의 제휴를 주장하면서 임정과 소원해지자 1920년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을 창립했다. 특히 3·1운동 후 그를 국빈초대한 일제를 상대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주장, 그의 기개와 인품에 반한 한 일제관료가 "여운형 만세"를 외쳐 임시정부의 독립신문 논설에 대서특필됐다.

해방 후 '건국동맹'을 모체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당'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박헌영과 관계로 사회주의자로 정적의 비판을 받았다. 1947년 7월 10일 서울 혜화동네거리에서 예언처럼 피살됐다.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마침내 1990년대 이후에서야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았다.

우문기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