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성미의 책속 심리] 은교 / 박범신, 문학동네 펴냄

이 소설은 노년기의 사회심리적 과제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성공한 시인이며, 베스트셀러 작가를 길러낸 훌륭한 스승이었던 이적요는 자신의 삶을 전면 부정하며 절망감으로 죽음을 맞는다.

사람의 일생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무자비한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되돌아갈 수도 없고 나아가지 않을 수도 없다. 주인공 이적요는 20대에는 사회주의 운동을 했고, 30대에는 감옥에 있었고 40대부터 죽을 때까지 시인으로 살았다. 청춘도 없이, 젊을 때도 중늙은이처럼 오로지 일만 하며 살아온 시인을 맞이한 것은 노추의 외로움이었다. '늙은 것, 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 늙은이의 욕망은 더러운 범죄이므로 제거해 마땅한 것.' 이적요의 마지막 섹스 장면은 신체적 노화가 얼마나 큰 심리적 상처를 주는지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이때 여고생 은교를 만난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사실이다. 은교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이 불편한 고백의 실체는 무엇일까. 노인의 음탕한 정욕일까.

은교는 손녀 같고 어린 여자 친구 같고 가끔은 누나나 엄마 같았다. 열살 때 향긋한 복사꽃 내음을 풍기는 하얀 저고리를 입은 D누나. 평생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생각했던 그 누나, 은교를 보면 그 누나가 떠올랐다. 시인은 은교를 통해 10대로, 고향집으로,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살붙이 같았던 제자 서지우와 갈등이 불거지고 병만 얻은 이적요의 심리적 퇴행은 은교를 통한 섹슈얼 판타지를 낳게 했다.

서지우는 이적요가 쓴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여 큰 명성을 얻지만 정체감을 잃어버린 마음의 불구자다. 스승이 아끼는 은교를 농락하는 것이 늙은 이적요를 정복하고 열등감과 왜소감을 상쇄하는 길이었다. 이적요는 제자와 돈 문제에서 비롯된, 더 깊고 복잡한 심리적 갈등이 점차 의심으로 바뀌고, 서지우가 은교를 탐하는 광경을 본 후로, 살인 충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서지우가 죽고, 이적요는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다.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고, 암이 전신에 퍼졌지만, 치료 대신 술만 마시다가 혼자 죽었다. 그가 평생 그리워한 것은 '할아부지, 밥 먹어요.!' 이런 사소한 말이었다. 지독한 외로움과 노년기 우울증의 심연에서 스스로 죽음을 재촉했다. 이적요의 독백이다.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미쳤다. 불과 한달 반 만에 썼다. 폭풍 같은 질주였다'고. 아마도 작가는 이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는 말일 게다. 소설가 조지 기싱은 '작가의 진실한 자서전은 오로지 그가 쓴 소설에서 나온다'고 했다. 산다는 것은 오욕칠정을 다스리는 '오랜 병'이라고 한 노년기의 박범신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음과 마음 정신과 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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