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끝나지 않은 6·25] ⑬공산군의 패주(1)

한반도 적화통일 야망 붉은 낙동강이 막았다

미군 병사가 수색 도중 앳된 인민군 소년의 시신을 발견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미군 병사가 수색 도중 앳된 인민군 소년의 시신을 발견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낙동강 전선에 몰려 있던 인민군 전사들은 밤낮없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한·미 연합군의 열탄에 완전히 노출된 채 저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이제 독전대의 싸늘한 총구도 두렵지 않았다. 전장의 병사들은 누구나 마지막이라는 결단을 내렸을 때 가장 용감해진다고 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곤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길밖에 없었다.

현 전선을 사수하느라고 쇠사슬에 묶인 채 곳곳에서 악을 바득바득 쓰며 밀고 밀리다가 결국 남진 이래 최대의 패전위기에 내몰리고 있었다. 마침내 통신이 두절되고 지휘계통이 무너져 최일선에 배치됐던 군사군관과 전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저마다 백기를 들고 투항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8월 15일까지 대구와 부산을 점령,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적화통일한다는 북한공산집단의 무모한 작전계획이 한낱 망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전선 사령관 김책은 일대 반격을 개시한 한·미 연합군의 파상공세에 버티다 못해 마침내 전열정비를 위한 철수를 결심하기에 이른다. 김일성의 정치명령을 외면한 그의 일방적인 방침이었다.

김책은 무엇보다 사면초가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지리멸렬해가는 낙동강 하류의 제1집단군 예하 전투사단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한 거점 확보가 시급했다. 그는 우선 다부동을 거쳐 대구 접경지역인 칠곡 동명까지 진출해 있던 제3사단에 일단 왜관 북방으로 철수해 경부국도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때를 놓치고 말았다. 미 제1기갑사단과 낙동강 남안에서 진출한 미 24사단이 이미 왜관을 탈환하고 경부국도를 장악, 김천으로 진격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공산 입구 동명 봉암리까지 진출해 금호강의 팔달교를 건너 대구로 진격하려던 적 3사단은 전선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왜관 북방으로 철수하다 최신형 M-26 퍼싱 탱크의 강력한 화력을 앞세운 미 제1기갑사단과 맞닥뜨렸다. 이 전투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위되어 결국 1개 연대가 전멸하고 나머지 병력은 상주 방면으로 패주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전선사령부가 제시한 퇴각로를 믿고 왜관 방면으로 들어오던 적 4사단은 오히려 퇴로가 막혀 황급히 고령 쪽으로 역후퇴하는 고난의 행군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 최고사령관으로부터 '서울사단'이라는 명예칭호까지 받은 막강한 제3·4돌격사단이 괴멸 직전에 놓이는 시점이었다.

김일성의 친위부대이기도 한 이들 돌격사단은 사실상 남침작전의 원천(源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의 선봉에 선 이영호·이건무 사단장은 광신적인 공산주의자들로 나름대로의 자부심과 위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잘 싸웠다는 자만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결국 형편없이 쫓기는 패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건무의 제4돌격사단을 뒤따르던 10사단도 미 지상군의 강력한 반격전에 밀려 전투장비를 다 버리고 고령을 거쳐 성주 방면으로 퇴각했다. 2사단 역시 병력과 장비를 대부분 상실하고 지휘부만 가까스로 고령~성주로 빠져나갔다.

특히 박효삼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병력은 창녕, 함안 방면으로 진출했다 미 제25사단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나 후퇴하는 과정에서 낙동강물이 불어나 도하작전마저 포기했다. 9사단은 한동안 퇴로를 찾아 헤매던 중 별안간에 나타난 미 공군 F-86 세이버 전폭기편대의 기총소사로 대부분의 병력이 낙동강 흙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수장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6·25 남침전쟁 개전 초기 옹진반도와 개성을 거쳐 서울을 점령하고 경기도와 충남, 전남·북을 거쳐 경남 통영까지 진출했던 제6사단은 잔존병력 4천여 명을 이끌고 가장 멀고도 험한 후퇴작전에 돌입해 있었다. 그러나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진주·산청·거창 방면에서 퇴로가 막혀 산지사방(散之四方)한 대부분의 주력이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로 들어가 빨치산으로 변신했다.

인민군 6사단장 방호산 소장 역시 팔로군 출신인 연안파의 핵심이었으나 소련파에 밀린 여느 장성들과는 달리 김일성의 신임을 받고 인민군 최고사령부 정보부사령관으로 남침계획에 참여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한낱 패장으로 전락했다. 여기에다 6사단을 뒤따라 여수·순천을 거쳐 남해안까지 진출했던 7사단도 박성석 사단장이 전사하고 역시 퇴로가 막혀 지리멸렬해 버렸다.

다부동에서 대구 침공의 망상에 사로잡혔던 적 1사단은 13사단과 합동작전으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에 맞서 10여 일간에 걸친 처절한 공방전 끝에 대구기점 12㎞까지 진출했으나 탄약이 바닥나는 바람에 자그마치 2천500여 명의 사상자를 버린 채 패주하고 말았다.

6·25전쟁 중 최대의 격전을 치른 낙동강 유역의 모래펄과 들판, 능선 등 폐허로 변한 곳곳에는 부서진 T-34 탱크와 포차만 전쟁의 상흔처럼 을씨년스럽게 나뒹굴고 기총소사에 찢긴 인민군의 시체가 낙동강의 탁류에 휩쓸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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