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공격받고 있다. 살기 바빠지고, 공부에 시달리면서 '8시간 수면'이 집중포화를 받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주중 '8시간 수면'이라는 원칙은 완전히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3 수험생들은 흔히 '4當 5落(4당 5락)'이라는 말로, 4시간 자면 대학에 붙고 5시간 자면 대학에 떨어진다는 '경고' 혹은 '협박'을 받기도 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다. 하루 8시간을 잔다고 하면 왠지 '게으른 사람'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밤새 눈을 벌겋게 뜨고 인터넷 게임을 할망정 잠을 자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 전 가천의대 정신과 이유진·김석주 교수팀이 국내 중·고교생 8천530명을 대상으로 조사하고 발표한 '국내 중·고교생 수면부족 실태'에 따르면 중·고교생의 평균 수면시간은 하루 6.1시간이었다. 고등학생은 평균 5.8시간, 여학생은 5.9시간이었다. 10명 중 1명은 하루 4시간 이하로 잔다고 답했다. 이는 독일의 12∼18세 청소년의 평균 수면 8시간과 스페인 청소년의 7시간에 비하면 상당히 짧다. 휴일 수면시간 역시 외국의 청소년에 비해 2시간 정도 짧았다.
성인들도 수면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www.saramin.co.kr)'이 직장인 1천598명을 대상으로 '하루 평균 수면시간'에 대해서 조사한 결과, 평균 5시간 55분으로 나타났다. 응답한 직장인 68.5%는 '수면이 부족하다'라고 답했다.
◇ 휴일에는 늦잠을 자라
정신과 전문의들이 말하는 성인의 적정 수면시간은 하루 7, 8시간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하루 7, 8시간 수면은 '낙방' '게으름' '허약함' 등의 오명을 뒤집어쓰기 일쑤다. '빨리빨리' '부지런히'를 외치며 달려온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수험생이 휴일에 늦잠을 자면 부모는 안절부절못한다. '그렇게 늘어지게 자고 공부는 언제 할 거냐'며 이불을 확 걷어치우는 어머니들도 많다. 직장인이 휴일에 늦게까지 이불 속에서 뒹굴면 아내로부터 '아이들 데리고 야외 나들이라도 갈 생각은 않고 종일 뒹굴 궁리만 한다'는 타박을 받기 일쑤다. 늦잠은 곧 게으름인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의 생각은 다르다.
"휴일 늦잠은 결코 게으름이 아니다. 농업이 중심이던 시대에는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일상생활에서 낮과 밤의 구분이 적어졌고, 사람들은 만성 수면부족에 시달리게 됐다. 평소에 수면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휴일 2, 3시간 늦잠은 꼭 필요하다."
김성미 마음과 마음 정신과의원 원장은 "적정한 수면시간을 확보하지 않을 경우 집중력 저하, 무기력증, 체력 저하, 면역력 감소, 신경 날카로워짐, 피부 트러블, 기억력 감퇴 등 다양한 피해가 나타난다" 며 "휴일 늦잠은 면역력, 집중력을 높이고 감정적으로 유연성을 갖도록 도와준다. 수면 시간을 줄이는 것은 마이너스 통장에서 돈을 빼 쓰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당장 빼 쓰는 재미는 쏠쏠할지 모르지만 결국 빚이 눈덩이처럼 늘어나 감당하기 어렵듯, 건강을 해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기 컨디션과 상관없이 매일 일정시간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해야 한다. 몸 상태가 좋다고 하고,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안 할 수 없다. 그러니 충분한 수면과 휴식은 필수다. 가천의대 이유진 교수는 "수면 부족은 주의력 결핍과 우울증, 자살 사고 등과 연관이 있다"며 "청소년기의 수면 부족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과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라고 말한다.
◇ '키 높이 책상'의 억지
우리나라 학교에 '의자 없는 책상' 그러니까 '키 높이 책상'이 등장했다. 책상 다리를 높여 학생들이 서서 공부할 수밖에 없도록 고안한 것이다. 이 책상을 도입한 학교는 '모범사례'로 거론되기도 했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꾸벅꾸벅 졸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대구시교육청 학부모정책 담당 이상현 장학사는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잠자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는 좋다. 그러나 '키 높이 책상'이 좋은 사례로 거론되고 이것을 칭찬하는 사회는 어처구니가 없다. 의자에 앉으면 곧 잠이 들 정도로 지쳐 있다면 차라리 30분, 1시간을 재우는 게 옳다. 그런 식으로 억지로 잠을 깨워서 무슨 공부를 얼마나 시킬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자란 우리 청소년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우려했다. 악착같이 수면시간을 줄이려는 태도, 잠을 죄악시하는 사회 분위기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현 장학사는 "오랜 학교 근무를 통해 볼 때, 학생들의 잠을 막을 수는 없다. 잠을 덜 잔 만큼 집중력이 떨어지고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학생들 중에는 스스로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수업시간에 일부러 짧게나마 잠을 청하는 경우가 있다" 며 "재울 잠은 재우고, 공부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미 원장은 "잠이 부족할 경우 생체시계가 망가지고, 이는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초기에는 주로 입과 혀가 헐고, 두통, 미열, 피로, 식욕 부진, 무력감, 근육통, 관절통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초기에 신체는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려고 부신피질자극호르몬(ACTH)과 부신피질호르몬(Steroid)을 많이 분비해 저항력을 높이지만, 지속될 경우 탈진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더 이상 호르몬 분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회복 불가능한 질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늦잠은 사치가 아니다
평소에 잠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쯤 늦잠은 보약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주말 늦잠이 지적 능력에 필수적인 부양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원 수면시간생물학과 과장 데이비드 딘지스 박사는 '주말 늦잠은 게으른 사치 그 이상'이라며 '웰빙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휴일의 추가 수면이 바쁜 현대인의 월요일~금요일 수면부족 회복을 도와주는 데 1, 2시간 추가 수면으로 행동 지각, 업무 효율성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성인 3만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데이비드 박사의 이번 연구에 따르면 하루에 5시간 미만을 자는 사람들은 7시간을 자는 사람들에 비해 심장마비, 뇌졸중, 협심증을 포함하는 심장혈관계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2배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무조건 많이 자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하루 9시간 이상을 자는 사람들 역시 현저히 높은 위험을 겪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에 따르면 하루 4, 5시간을 자는 사람은 주의 지속시간 감소, 지각 손상, 반응시간 감소 현상을 보였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기억력도 감퇴됐다. 그러나 부족한 수면 뒤에 하룻밤을 푹 자고 나면 곧 정상으로 회복했다. 평소 수면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휴일 늦잠은 보약인 것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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