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을 걷다…동행]<41>경산 용산산성에 오르다

지그재그 여덟번 돌아오른 山城 '순례자의 길' 걷는 듯…

용(龍)의 전설은 전국 어느 곳에서 있지만 그 이름을 그대로 따서 산을 명명한 곳은 찾아볼 수 없다. 경산시 용성 땅에 있는 용산은 해발고도가 435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아기자기한 전설과 우거진 숲길, 무지개샘으로 유명한 곳이다. 위성사진을 보면 경산시에서 자인을 지나 용성으로 이어지는 평야에 남에서 북으로 불쑥 내민듯한 산자락이 보이는데 바로 용산이다. 뜬금없이 생겨난 산세 때문인지 몰라도, 산의 생성을 둘러싼 전설도 다소 황당하다. 하지만 전설의 재미는 바로 그 난데없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아주 먼 옛날(아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란 표현이 이 때 쓰이면 적절할 터), 용성 땅 어느 마을에 사는 한 아낙이 이른 아침에 마을 앞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방에 안개가 자욱해지며 불과 2~3리 앞에 거대한 형체가 조용조용 움직이고 있더란다. 무언가 싶어 가만히 살펴봤더니 어마어마하게 큰 형체가 걸어오고 있더라는 것. 그 크기에 압도당한 아낙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어머나! 산이 걸어온다"라며 비명을 지르고는 그만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잠시 뒤 깨어난 아낙은 다시 한 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개 속에 쌓여 걸어가고 있던 산이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는 것.

용산은 비슬산 자락이 동쪽으로 뻗고, 운문산 자락이 북쪽으로 뻗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거대한 지맥이 서로 끝을 대하고 만나며 야트막히 낮아질 법한 곳에 봉긋하게 산이 솟아있으니 옛 사람들이 보기에도 신기했던 모양이다. 용성면소재지에서 용산을 옆에 끼고 계속 남으로 달리면 청도 운문에 닿게 된다. 면사무소에서 운문으로 이어지는 919번 지방도를 따라 남쪽으로 1.5km쯤 가면 오른편에 '용산산성'을 알리는 팻말을 만난다. 용산 동편에 옹기종기 자리잡은 곡신리 마을을 통과하면 용산에 오르는 숲길이 나온다.

산 아래 밭에는 포도알이 가을 햇살 속에 영글고 있었다. 깜짝 놀랄 만한 크기의 대추알도 짙푸른 색에서 갈색으로 옮겨갈 채비를 하고 있다. 1994년 조성된 숲길은 조금 가파른 편이다. 지그재그로 여덟 번을 꺾이면서 용산산성 입구로 나그네를 안내한다. 마을 어귀에서 길을 나서면 2.5km쯤 걸어야 한다. 숲길은 빗물에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부분 콘크리트로 덮혀있다. 하지만 울창한 숲을 감상하며 걷기에는 딱 좋다. 중턱 쯤에 솟아나는 옹달샘이 길손을 반갑게 맞아준다. 길 안내를 맞은 용성면사무소 김상열씨는 "지금도 이 곳 옹달샘 물을 받아서 김장을 하거나 장을 담그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 물로 담근 장은 유난히 맛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정상부에 자리잡은 용산산성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성내에서 발견된 토기나 기와조각으로 미뤄볼 때 신라시대 성곽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사료가 부족한 탓인지 성의 축조에 얽힌 전설도 남아있다. 용산이 생기면서부터 산 중턱에 있는 샘에는 하날의 비를 다스리는 큰 용이 살았더란다. 어느 날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작은 장수들이 몰려와 산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날랐는데, 산을 지키던 샘의 용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화가 나 짙은 안개를 피웠다. 장수들은 큰 바위를 안고 날아오다가 미처 산에 닿기도 전에 들판 가운데 바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결국 장수들은 용을 찾아가 "이 고장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으려는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고, 용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젠 됐다'고 안심한 장수들은 먼 곳에서 돌을 날아오는 대신 무지개샘 주위의 돌을 마구 날라 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용은 다시 일대에 석달간 가뭄이 들게 했다. 견디다 못한 장수들은 다시 용을 찾아가 사흘간 엎드려 빌었고, 그제서야 화가 풀린 용이 억수같은 소나기를 내렸다고. 그러자 샘에서 무지개가 높이 떴고, 이 때부터 '무지개 샘'으로 불렸단다.

무지개 샘에는 다른 전설도 깃들어있다. 의성 금성산에 있는 전설과 비슷하다. 묫자리를 쓰면 일대에 극심한 가뭄이 든다는 것. 때문에 이 곳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무지개 샘을 찾아가 기우제를 지내고, 미리 준비해 간 괭이나 삽으로 일대를 샅샅이 뒤진단다. 행여 근처에 누군가 무덤을 쓰거나 죽은 사람의 백골이 묻혀있지 않은 지 확인하기 위해서. 만약 백골이 발견되면 후손을 찾아 산 아래 마을에 묶어놓고 매질을 하면서 비를 기원하는 주문을 했고, 후손을 찾지 못하면 백골을 멀리 던지며 비를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무지개 샘이 있는 용산이 워낙에 명당터여서 부근에 묘를 쓰면 당대에 큰 인물이 나거나 큰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바로 이 대목도 의성 금성산과 똑같다. 짐작컨대 함부로 산을 파헤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 새 용산산성 입구에 닿게 된다. 최근 옛 모습을 추정해 복원해 놓았다. 워낙 오랜 시간 방치된 탓에 성곽 대부분은 제 모습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김상열씨는 "성곽을 복원하기 전 옛 성터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널찍한 큰 돌이 있었는데 어느 날 와보니 사라지고 없었다"며 "당시 관리가 잘 안되는 틈을 타 누군가 훔쳐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성곽은 형태를 잃었지만 성내를 둘러볼 수 있는 오솔길은 남아있다. 성 둘레는 1.5km. 가파르지 않아서 찬찬히 사색하며 걷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정상에 올라서면 용성 일대뿐 아니라 자인과 경산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때론 급하게 때론 완만하게 이어졌던 오르막이 끝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마음의 여유도 생긴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면 다시 산성 입구로 돌아올 수 있다. 아직 용산 숲길, 특히 성내 오솔길은 사람의 발길을 많이 타지 않은 곳이다. 덕분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산을 내려오며 옹달샘에서 목을 축였다. 단 맛이 느껴진다. 가뭄이 들지 않는 걸 보면 무지개 샘의 용이 요즘은 화를 내지 않는 모양이다. 용성 땅은 유난히 용의 전설이 많다. 인근 구룡산과 반룡산에도 신성한 용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경산시 용성면사무소 김상열, 경산시청 공보실 053)810-6061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 김영대 작-용산산성

산성에 오르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도 멀지도 않다. 하지만 마을에서 차츰차츰 오르는 그 길은 마치 어떤 지향점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길처럼 굽이치며 더디 나아간다. 외로이 우뚝 선 용산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제단에 오르는 기분이 든다. 거대하게 쌓아올린 피라미드 같은 느낌도 받는다. 김영대 작가의 그림 속에서 산성은 얼핏 현실 세계를 떠나 선계로 향하는 착각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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