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예산안이 8일 확정됐다. 국비가 정해짐에 따라 대구경북의 살림살이도 윤곽을 잡았다. 국회에서 정부 예산안보다 대구는 500억원, 경북은 3천억원 늘렸다. 이러한 예산안이 확정까지는 숱한 과정이 있다. 기초지자체→광역지자체→해당 부처→기획재정부→국회 상임위원회→국회 예결위원회→국회 본회의를 거쳐야 살림살이가 확정된다. 국비를 따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작품이다.
낙동강에 인접한 모 기초자치단체의 공무원인 A씨. 평소 기획력과 아이디어가 남다르다는 평을 드는 그는 낙동강 살리기 사업에 맞춰 해당 지역에 대규모 수변관광레저단지를 개발하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상은 대한민국에서 누구도 생각지 못하는 최대, 최고의 관광레저단지를 만드는 것.
아이디어는 대략 이렇다. 661만㎡(200만 평) 규모에 약 10조원을 투입해 도쿄 디즈니랜드에 버금 하는 수변디즈니랜드와 국내에서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최고급 전원주택 단지인 리버파크 빌리지, 최근 지자체들이 눈독을 들이는 경정장, 외국인을 상대하는 선상 카지노, 각종 박물관 등등. 하나하나가 그의 고향을 천지개벽하게 하는 아이디어였다.
문제는 돈. 하위직 공무원에 불과한 A씨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거대한 예산이었다. 하지만 추진력까지 갖춘 그는 최대한 길을 찾았다. 우선 해당 지자체 단체장을 찾아가 구상을 설명하고 적극 설득했다. 엉뚱하지만 현실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판단한 단체장은 계획서를 마련토록 지시했다.
◆정부를 설득하라=그 뒤 A씨와 단체장은 본격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우선 기획재정부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의뢰하기로 작정했다. 낙동강 살리기 사업의 성공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재정부도 낙동강 주변에 명품 도시를 만들면 야당과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예타를 의뢰했다. 그 결과 '현실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환호성을 지른 A씨와 단체장은 본격적으로 예산 확보를 위해 실천에 돌입했다. 이들이 눈독을 들인 시기는 1월 말. 정부는 국가재정법에 따라 매년 5년 이상 단위의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수립해 예산안과 함께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이 때문에 중앙부처와 지자체는 1월 31일까지 향후 5년 동안의 신규사업 및 주요 계속사업에 대한 중기사업계획서를 재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A씨는 광역지자체와 주무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이 사업의 필요성을 적극 설득하며 중기재정계획에 포함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국책사업으로 확정되면 지방비 매칭 없이 안정적으로 사업을 진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재정부는 중앙부처나 지자체가 제출한 사업 항목 및 예산안을 바탕으로 3월까지 필요한 사업을 선정하고 나머지는 탈락시킨다. A씨가 제안한 사업의 경우 규모가 너무 크고 방대하다는 이유로 중기재정사업에서 탈락시켰다.
A씨는 낙담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음 기회를 노려야 했다. 재정부가 4월 30일까지 내년도 예산편성 지침을 지자체에 보내는 것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 지침에 따르면 중앙부처와 지자체는 6월 30일까지 다음 연도의 세입세출 예산, 계속비, 명시 이월비 및 국고채무 부담 행위 요구서를 작성해 제출토록 했다. 사업 규모가 너무 크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 따라 A씨는 사업 규모를 다소 축소했고, 내년도 예산을 애초 1조원에서 5천억원으로 절반까지 줄여 신청했다.
6월 30일 중앙부처와 지자체의 사업 계획서를 제출받은 재정부는 A씨의 사업에 대해 타당성을 검토한 결과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을 내려 예산을 한 푼도 배정하지 않았다. 재정부는 그 밖의 타 부처와 지자체의 예산을 두고 해당 기관과 수차례 협의를 거친 뒤 9월 말 청와대에 보고했다. 이어 10월 2일 국회에 내년도 예산안을 제출했다.
◆국회에 읍소하다=예산안이 국회에 넘어가면서 A씨는 더욱 다급해졌다. 사업을 시작도 못해보고 좌초될 위기에 처한 때문이다. A씨는 지역의 문화관광방송통신위 소속 국회의원실을 찾아다니며 읍소하기 시작했다. 국회 상임위 예산 심사를 염두에 둔 행보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을 마음에 간직한 채 지역 국회의원을 직접 만나 열성적으로 타당성을 설명한 결과, 해당 국회의원으로부터 상임위에서 1천억원가량을 신규 사업비로 책정할 수 있다는 답변을 얻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해당 의원은 상임위에서 동료 의원들을 설득시킨 끝에 사업비 1천억원을 책정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상임위 예산 심사안이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넘어가면서 뜻하지 않은 벽이 생겼다. 여야 지도부가 상임위에서 증액한 예산이 너무 많다고 판단, 상임위에서 만든 신규 사업을 예결위에서 일괄 삭감한다고 합의하면서 1천억원도 날아갈 지경에 봉착한 것.
발등에 불이 떨어진 A씨는 지역 국회의원 중 예결위 소속 의원을 찾아가 읍소하기 시작했다. 지역 발전을 위한다는 사명감으로 눈에 불을 켰다. 그나마 재정부 고위직 출신의 지역 국회의원이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에 들어간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해당 의원은 예산안 법정 통과 시일인 12월 2일을 넘겨 여야의 지루한 줄다리기 협상 끝에 상임위 증액분 1천억원을 포기하는 대신 타당성 조사비용 100억원을 겨우 책정했다. 연초 10조원 사업을 구상하고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뛰었지만 결국 국비 100억원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A씨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예산 확보가 이렇게 어려울 줄은 정말 몰랐다. 이제야 국가 예산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윤곽은 파악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이창환기자 lc15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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