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낙동강시대-스토리가 흐르는 마을] (22)봉화 비나리마을(2)

동네 喪 나면 집집마다 '초롱' 들고 와…100년 '초롱계'가 마

낙동강 옛 배나들이나루터와 백룡담, 풍락산 자락을 중심으로 임장군의 전설과 빨치산의 핏자국이 아스라이 흐른다. 임장군 서낭님을 부르는 동제와 상가(喪家) 불을 밝힌 초롱은 100년을 넘어 마을을 묶어주고 있다. 봉화군 명호면 풍호1리 비나리마을. 전통을 잇는 50가구 주민과 마을 선진화를 도모하는 8가구 귀농자들이 어우러져 비나리의 내일을 밝히고 있다.

강 건너 고계리로 가기 위해 명호교를 세우기 전까지 배나들이나루터를 통해 2대의 배를 띄웠고, 겨울이면 섶다리(나무로 엮어 흙이나 짚을 덮어 만든 다리)를 놓았던 비나리는 이제 새 마을로 진화하고 있다.

송성일(49) 씨 등 성공적으로 정착한 귀농자들이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어 2002년 녹색농촌체험마을, 2003년 정보화마을로 선정됐다. 현재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대상지로도 선정돼 2013년 완공을 목표로 귀농연수관, 다목적회관 등을 갖춘 '청량산지역 마을활성화센터'를 건립하고 있다.

◆공동체의 힘, 초롱계

비나리 공동체를 묶어주는 힘은 임장군을 기리는 동제와 함께 100여 년을 잇고 있는 초롱계이다. 초롱계는 옛날 전기가 들어오기 전 마을에 상(喪)이 나면 집집마다 초롱을 하나씩 들고 가 상을 당한 집에 불을 밝혀주는 데서 비롯됐다. 상갓집에 기름을 가득 넣은 초롱과 함께 쌀 한 되, 팥죽 한 그릇을 들고 찾았다는 것. 초롱은 불을 밝히고, 쌀 한 되는 부조금을 대신했고, 팥죽은 상주가 곡을 하다 지치면 먹으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박영화(61) 씨는 "옛날에는 유리 대신 종이로 만들었어. 초롱 속에다 호롱을 넣어가지고 석유 넣고 문종이 심지 넣어가지고 불 켜가지고 다녔지. 초롱계가 왜 형성되었냐 하면 상을 당했을 때 초롱이 참 필요했단 말이라. 전기가 없을 때 말이라. 화장실에도 걸아가야 되고"라고 말했다.

초롱계원들은 우선 상갓집 상여를 멨다. 상여는 양쪽으로 16명씩 32명이 메고, 혼백상자 앞에 2명, 상엿소리 하는 사람 1명 등 모두 35명이 상여를 옮겼다고 한다.

지금도 비나리 중간모치에는 상여를 보관하는 상엿집이 남아 있다. 중간모치에는 마재와 곳집 개골이란 지명이 남아있다. 마재는 말의 형상을 한 마을이라 이름 붙여졌고 곳집 개골은 상엿집이 있는 개울이란 뜻이다. 마재의 상엿집에는 100여 년을 내려온 규모가 큰 상여가 도난당한 후 주민들이 새로 마련한 자그마한 상여가 남아 있다. 상여를 메는 사람도 35명에서 16명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상여 풍습은 이어지고 있다.

정화자(55) 씨는 "병원에서 죽더라도 이 동네로 들어오면 어떻게든 동네 사람들이 (상여를) 메준다"고 했다.

비나리 공동체를 묶어주고 있는 초롱계의 계첩은 현재 1957년부터 그 기록이 남아있지만, 상엿집이 100년을 훌쩍 넘긴 것을 비춰볼 때 초롱계 풍습도 100년이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나리 사람들에게 초롱불은 어려운 일을 당했던 이웃을 위해 밝혔던 불이자, 단결의 불이었다.

◆이념 대립이 낳은 상처

비나리에도 해방 후부터 6·25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념 대립으로 인한 상처가 남아 있다.

당시 좌익의 대표 세력은 빨치산이었고, 우익의 대표적 청년단체는 이승만 정권이 만든 대한청년단(한청단)이었다. 빨치산과 한청단 모두 6·25가 끝나면서 소멸하거나 해산했다.

일부 비나리 주민들은 빨치산의 횡포를 말했다.

김복남(77) 씨는 "밤패들이 동네 산너메 돌아가면 아지트로 있었어. 밤으로 떼 몰아와 내려와서 소 몰아가고, 살림 떨어가고 그랬다고. 쌀 퍼가지고, 냄비 장 버리고. 젊은 사람은 집안에서 자지도 못하고 다락에 올라가서 자고. 붙들리 갈까봐…."

주민들은 빨치산을 '밤에 돌아다니는 패거리'라고 밤패로 불렀다. 당시 한청단은 빨치산 소탕의 선두에 섰고, 빨치산은 한청단이 군, 경찰과 함께 눈엣가시였다. 권병조(82) 씨는 한청단 소속의 큰형님이 빨치산들에게 불타 죽을 뻔한 일을 털어놓았다.

"한청단 명호면 단장을 했던 형님과 그 밑에 감독관을 했던 정기만 씨가 저녁에 순찰 내려왔던 밤패들에게 걸려 얻어 맞아가지고 죽을 뻔했어. 옛날엔 깔비(소나무 마른 잎)를 많이 해다 놓았어요. 거기다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말이라. 그 사람(정기만)은 고마 죽었고, 형님이 깔비가 타니깐 구불렀어. 옆집 노인이 병원으로 옮겼지…."

권 씨의 부인 박선옥(75) 씨가 말을 이었다. "봉성 재해병원이 있었는데, 빨갱이들이 나와가 채렸는 병원이란다. 그래가 우리 아주버님이 얼마나 별나노. '이놈의 새끼들 빨갱이들이 사람 죽인다'고 치료 안 받을라고 소리 소리 지르고. 그래도 그 사람들이 치료해 주더란다."

6·25전쟁이 나면서 비나리도 국군과 인민군의 접전에 휩싸였다고 한다. 비나리 입구 강 건너 봉화 명호면 고계리와 안동 방향의 교차점을 서로 탈환하기 위해 국군과 인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몇 차례의 접전 끝에 국군이 마을을 탈환했다는 것. 인민군들은 부상병들을 고계 다리에 버리고 갔는데, 부상병 9명은 비나리 마을 곳곳에 숨어들어왔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부상당한 인민군을 찾아내 국군에 넘겨 모두 죽였다고 한다.

6·25 당시 비나리에서는 마을 남자 51명이 전쟁터에 나갔지만, 돌아온 이는 5명뿐이었다고 한다. 권영식(80) 씨는 인민군 포로로 끌려 다니기도 했다.

권 씨는 "6.25 나던 해 갔지. 강원도 서숙면에서 낙오가 되어가지고 포로가 되었다. 우리 사단이 인민군 포로가 돼서 전장하는 그 밑에서 가마니떼기로 부상당한 인민군들 후송하는 거였지"라고 말했다.

◆소 생일과 밭농사

비나리에는 소가 대접받는다. 트랙터 등 농업 장비를 활용할 수 없는 산골 오지에서 그렇듯 주민 대다수가 풍락산 비탈진 자락에 밭을 일구고 사는 탓에 소는 필수다. 산비탈을 깎아 고랑을 만들고 개간하는 일도, 수확한 곡식을 짊어지고 옮기는 일도 소의 몫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주민들은 소가 태어난 날과는 별도로 '소 생일'을 챙겨왔다. 직접 낳은 새끼를 기르지 않는 이상 태어난 날을 알 수 없기에 단오를 소 생일로 잡았던 것이다. 소 생일에는 소 이밥(쌀밥)을 먹인다. 소가 가장 좋아하는 풀을 뜯어 하루 종일 일을 시키지 않고 그 풀만 먹이는 날이다.

박영화 씨는 "5월 단옷날 소 생일이라 그랬다고. 그래가지고 산에 가서 '안들메'라는 풀이 있어. 억새풀 비슷하고 보들보들한데 그걸 소 이밥이라 그랬다고. 단옷날 아침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주고 그 풀만 주는 거야. 생일이라고 완전 상전 대접이었지"라고 말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도 추울 때는 어김없이 짚을 엮어 만든 외투(삼정)를 등에 덮어줬다고 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마을이기 때문에 비나리 사람들은 마을을 벗어나 밭농사를 짓는 일이 없다. 소를 이용해 개간한 밭에서 감자, 조, 콩, 보리 등을 심었고, 수확한 곡식은 소나 지게로 짊어지고 내려왔다.

정분이(77) 씨는 "점심과 저녁은 밭에서 해결해가며 산꼭대기에 올라가 밭을 일궈 콩, 보리를 심었어. 감자 캐 내린다고 몸서리났어. 억지로 지고 왔제"라고 했다.

비나리는 보리, 조와 함께 대추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1960년대 중반 이후 대추는 사라지고 고추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척박한 땅에 비료나 별다른 약품을 쓰지 않아도 됐기에 대추를 많이 재배했던 것. 하지만 비료가 양산되면서 재래종 대추나무에 비료를 치니 수명이 짧아지고 빗자루병에 걸렸다고 한다. 현재 비나리의 주 작물은 대추에서 고추로 바뀌었다. 주민들은 수확한 고추를 건조기에 말려 건고추 형태로 판매하고 있다.

권병조 씨는 "사 먹는 사람들이 여기 와서 직거래를 하면 가격도 좀 싸고 모든 게 다 좋은데. 상인들 두 손 세 손 건너서 사먹게 되면 말이라, 작년에 묵은 거 섞어서 파는 거 그것도 사먹게 될 꺼고…"라며 비나리의 고추 자랑을 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권상구·이가영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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