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2부-나라사랑 5)통일의 주역, 화랑

유신과 원효, 팔공산 석굴서 홀로 정진…꿈꾸는 세상을 하늘에 고했다

팔공산 오도암 뒤 청운대 암벽 석굴은 화랑 출신인 신라 김유신과 원효가 수행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굴 안에서 보니 비로봉 제천단이 아련하게 보인다. 석굴에는
팔공산 오도암 뒤 청운대 암벽 석굴은 화랑 출신인 신라 김유신과 원효가 수행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굴 안에서 보니 비로봉 제천단이 아련하게 보인다. 석굴에는 '장군수'가 고여 있다. 사진'이채근기자
청운대 석굴 앞에는 한 사람이 수행할 수 있는 좌선대가 있다. 이 좌선대에서 김유신과 원효가 수행하며 삼국통일의 소원을 천지신명에게 고했다고 한다. 사진
청운대 석굴 앞에는 한 사람이 수행할 수 있는 좌선대가 있다. 이 좌선대에서 김유신과 원효가 수행하며 삼국통일의 소원을 천지신명에게 고했다고 한다. 사진'이채근기자
청운대 석굴 아래 계곡 옆에는 김유신과 연개소문에 얽힌 사연을 간직한 시좌굴이 있다. 사진
청운대 석굴 아래 계곡 옆에는 김유신과 연개소문에 얽힌 사연을 간직한 시좌굴이 있다. 사진'이채근기자
팔공산 정상 군부대 자리는 김유신 등 옛날 신라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던 곳이다. 당시 2개의 우물 가운데 1개는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
팔공산 정상 군부대 자리는 김유신 등 옛날 신라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던 곳이다. 당시 2개의 우물 가운데 1개는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이채근기자

'너는 누구며 나는 누구냐/ 살아 사나이 죽어 사나이/ 끓는 한 줄기 화랑의 피로/ 티 없는 피는 죽음이 없다….'

옛날 화랑(花郞)들이 불렀다는 '도령가'(徒領歌)도 이랬을까? 신라 풍류(風流)와 화랑 연구에 매달렸던 학자 김정설(金鼎卨)이 지은 '화랑가'(花郞歌)이다. "진흥왕 때 '도령가'가 있었다는데 그 내용은 알 길 없고 하도 궁금해서 직접 썼다"는 노래다.

◆팔공산 석굴에서 싹트다

패망한 가야국 왕족 출신으로 신라 화랑을 대표하는 김유신(595~673)과 왕도 경주 아닌 먼 압량에서 태어나 화랑교육을 받았고, 출가와 환속으로 승속(僧俗)을 넘나들며 한국 불교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선각자 원효(617∼686).

화랑 인연을 가진 두 사람의 흔적이 남은 팔공산 암석 절벽인 청운대(靑雲臺)에 있다는 석굴(石窟)을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15세에 화랑이 된 김유신이 17세 때 '중악(中嶽)의 석굴로 홀로 들어가 하늘에 고하고 맹세를 했다'는 현장은 깎아지른 수직 암벽을 휘감은 바람길에 있었다.

길이 3m, 높이 1m 정도의 석굴은 김유신과 특별한 관계인 원효(김유신 여동생은 김춘추의 부인이 됐고, 김유신은 김춘추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으며 김춘추의 딸 요석공주는 원효와 인연을 맺음)가 6년간 수행했다는 곳이다. 이 때문에 서당굴(誓幢堀'원효의 어릴적 이름) 원효굴 장군굴 등으로 불린다.

원효가 수행했다는 오도암(悟道庵) 뒤쪽 수직 암벽의 석굴 바로 앞에는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족대(足臺)와 등받이까지 갖춘 좌선대(座禪臺)가 세상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석굴 바위 틈 사이로 떨어진 장군수(將軍水)가 고인 물은 발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시렸다. 석굴 밖으로는 멀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팔공산 비로봉 제천단이 아련했다. 석굴 아래 계곡 건너편 수목에 가린 시좌굴(侍佐堀)엔 김유신과 연개소문(淵蓋蘇文) 간에 얽힌 사연도 간직하고 있다.

경북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마을 주민들과 군위군의 협조 아래 밧줄에 의지해 겨우 다다른 석굴은 김유신이 만났다는 노인의 말처럼 '독사와 맹수가 많아서 무서운 땅'에 위치해 있었다. 일행 앞에 갑자기 나타난 뱀은 옛날 이곳에 맹수들이 있었다는 주민 이야기를 실감케 했다. 주민들은 "날씨가 잘 따라주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김유신은 무엇을 빌었을까. 원효는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런 험난한 곳을 찾았을까.

김유신은 '범이나 이리 떼처럼 침략하여 괴롭히는 적국'의 화란(禍亂)에서 조국을 구할 삼국 통일을 소원했으리라. 원효 역시 끊임없는 전쟁과 번민에 시달리는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누구나 평등한 정토(淨土) 사회 구현을 위한 '첫 새벽'을 열기를 빌었으리라. 원효의 아명(兒名)인 '서당'의 또 다른 이름인 '새부'(塞部)가 신라말로 '새벽'을 뜻했듯이 그의 법명(원효)처럼 대중불교의 '첫 새벽'을 열고자 이 석굴을 찾았을 터이다.

팔공산은 신라 오악(五嶽)의 하나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비로봉 제천단이 있던 곳이다. 군위 삼존석굴(제2 석굴암)과 관봉(冠峰)석조여래좌상(갓바위)를 비롯해 유서 깊은 동화사(桐華寺) 등 불교와 인연 많은 산이다. 삼국 통일의 소원을 하늘에 고했던 김유신의 맹세와 평등한 정토세상을 꿈꿨던 원효의 발원(發願)은 이곳 석굴에서 시작됐고,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우연일까.

신라의 비주류였던 김유신과 원효가 또 다른 비주류였던 김춘추를 만나 불가능할 것 같았던 통일과 신라 불교의 완성이라는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은 팔공산에서 그 단초를 놓았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명산에서 기른 호연지기를 바탕으로 신라 천년의 주춧돌을 놓았다. 좀 더 넓히자면 이 두 사람이 유불도 삼교를 수용하고 실천하는, 그런 개방적인 현묘지도(玄妙之道) 즉 풍류를 가진 화랑정신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의 밑거름

화랑과 풍류도 연구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던 김범부는 유학(교)과 불교, 도교 등 삼교(三敎)를 모두 포함하고 수용하는 신라 고유의 현묘한 도(玄妙之道)인 풍류도(風流道)가 화랑에게서 구체화됐다고 했다. 풍류도를 '멋'으로 본 그는 화랑들이 풍류도를 갖춘 인재들이었다고 했다.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화랑세기(花郞世記)의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생겼다'는 기록도 화랑 이야기였다.

여자로 구성된 원화(源花)에서 출발한 화랑은 576년 진흥왕 때 시작됐다고 하나 실제 사다함(斯多含)이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를 정벌할 때인 562년에 활약한 기록으로 봐서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백~수천 명의 낭도(郎徒)를 거느린 화랑은 신라 통일의 핵심이었다.

400여 년간 200여 명의 화랑이 배출됐고 이들은 신라 통일과 신라 조정의 기둥이었다. 10대 어린 시절부터 무리지어 다니며 심신을 수양하고 풍류도를 익혔고 세속오계를 잊지 않았다. 삼국사기의 '많은 사람들을 무리 지어 놀게 하여 그들의 행실을 알아 이들을 등용하려 했다'는 기록이나 삼국유사의 '무리를 뽑아 인물을 선발하고 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르침은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였다'는 이야기는 화랑을 일컬음이었다.

이들은 김유신과 원효가 수행한 팔공산이나 오대산 등의 산악, 울산 천전리 암각화 계곡, 경포대 등 해변 명승지, 왕도 경주 남산 등 명산대천을 찾아 수련했다. 팔공산 정상의 현 군부대 자리에선 200~300여 명이 훈련했고 그들이 사용했던 2개의 우물 가운데 1개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훈련하던 바위엔 말발굽 등이 새겨진 흔적들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수 없었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화랑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청소년 자체를 국가적인 목적에서 조직화하려 한 것과 유능한 인재를 관찰하여 국가에 천거하는 것"이라면서 "조직화의 궁극 목적은 군사 예비군으로서의 역할도 있었다"고 했다.

화랑들의 활약은 싸움터에서 더욱 빛을 발휘했다. 사다함, 관창(官昌) 등 유불도 3교를 섭렵한 수많은 화랑들은 임전무퇴, 충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기수였다.

◆화랑을 닮은 신라인들

화랑의 정신은 일반 신라인들의 정신이기도 했다.

"일찍이 스승(원광 법사)에게 듣기를 용사는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다. 어찌 감히 달아나겠느냐"며 아버지를 자기 말에 태워 보내고 친구 추항과 함께 장렬히 전사해 세속오계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귀산(貴山). "사나이는 마땅히 전장에서 죽어야 하거늘 어찌 집사람의 손에 자리에 누워 죽겠는가"라며 전사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죽음으로 충효를 다한 소나(素那). 이들은 신라인들의 충효정신을 보여줬다.

"여자에게는 세 가지 따라야 할 도리가 있다. 지금 홀몸이어서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겠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나도 네 어머니가 될 수 없다"며 싸움에서 지고 돌아온 아들 원술(元述)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김유신 아내의 이야기도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대장부가 나라에 몸을 바치기로 했으면 사람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한가지다. 어찌 감히 명예를 구하겠는가"며 죽음을 맞이한 왕족 출신인 김흠운(金歆運)의 생각은 나라 위함에 지위고하가 없다는 증거였다.

"위로는 나라를 위하고 아래로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며 김유신을 위해 죽음으로 보답한 비녕자(丕寧子)와 "아버지(비녕자)의 죽음을 보고도 구차하게 살아남는 것을 어찌 효자라 할 수 있겠느냐"며 아버지 뒤를 따라 장렬히 죽은 아들 거진(擧眞), "주인이 죽었거늘 죽지 아니하고 어찌하겠는가"며 주인의 복수에 나서 죽음을 맞이했던 노예 합절(合節)의 의리도 신라 정신이었다.

"승려로 이뤄낸 것이 없으니 군에 가서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승복을 벗고 군복을 입겠다"며 싸움터에서 죽은 동생 취도(驟徒)에 이어 참전, 전사한 형 부과(夫果)를 따라 막내 핍실(逼實)마저 "두 형들이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살아남아 있겠느냐"며 목숨을 바친 3형제 이야기 역시 위대한 화랑 정신이었다.

김범부는 "화랑정신은 신라정신이고, 화랑정신이 우리 민족의 전통으로 지금까지 우리 피 속에 흐르고 있다"고 칭송했다.

정인열기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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