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21>동성아트홀극장

"예술영화 전용관 어때?" 반신반의 두해 만에 관객 10대 증가 기적

노인은 취재 기자를 기다리며 복도에 가득 붙어 있는 영화 포스터들을 바라보고 있다. 벽에는 이 극장이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선정된 후부터 상영된 포스터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벽을 따라 움직이는 노인의 눈동자가 문득 영화 '오월의 구름' 위에 머문다. 노인의 눈동자에 따뜻한 기운이 스민다.

인터뷰에 응하기로 약속은 했지만, 생각하건대 자신의 삶은 누군가에게 들려줄 만한 그럴싸한 삶이 아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영화에 대한 특별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십여 년 전 재정난으로 영사실 기사와 매표 직원을 내보내고 난 후, 아내와 아들과 함께 이곳을 운영하며 종일 매표소를 지켜야 하는 탓에 영화 한 편 제대로 볼 여유도 생기지 않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내가 들려주는 줄거리로 상영작의 내용을 짐작할 뿐이고, 아들이 일하는 영사실에 들어갈 때 이따금 스크린에 스쳐 가는 장면을 지켜볼 뿐이다. 그런 그에게 '영화'가 주는 삶의 의미를 묻는다면 그저 '삶이었다'라는 말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다. 배고프던 시절, 가난한 집안의 맏이로 태어나 먹고살기 위해 영화 간판 화가의 일을 시작했고, 결혼해서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하루 살았던 삶이 오늘이 된 거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배경이 바뀌고, 사람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하루에 하루가 더해지다가, 시간이 되면 쓸쓸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뿐인 삶. 그뿐이다. 특별할 것이 없는 삶이다.

그러나 그 특별할 것 없는 삶이 '이야기'되어질 때엔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어쩌면 자신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했던 변화와 모험과 꿈과 사랑이 그 이야기 속에서 숨겨놓았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우리의 삶이 소홀히 버려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이유에서 영화가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소년 시절 그는, 깨진 창문 위에 덧대어진 달력을 따라 그리던, 그림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잉그리드 버그만과 게리 쿠퍼 같은 영화 속 인물 그리기를 좋아했었다. 밤새 그린 그림을 친구들 앞에 펼쳐 놓으면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대학 진학을 할 수 없는 형편 때문에 대구상고에 진학했지만, 주산과 부기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면 유일하게 그림을 배울 수 있는 칠성극장 미술실로 달려가 심부름을 해주며 곁눈질로 그림을 익혔다. 미술학도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열일곱 살의 가난한 소년에게, 몇 개 되지 않는 색의 안료에 아교풀을 섞어 빚어내는 색채와 형상은 황홀하고 멋져 보였다. 그림을 그려 먹고살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1960년대 당시 대구에는 시내에만 30여 개가 넘는 극장이 있었고, 영화 하나가 개봉되면 10개가 넘는 대형 간판이 시내 곳곳에 걸렸으니, 어려운 형편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영화 간판 화가는 꿈을 주는 직업이었다. 19살 되던 해, 만경관의 모집광고를 보고 응모하여 정식으로 영화 간판 화가가 된 그는 6m나 되는 자신의 그림이 시내 한복판에 걸리던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한다. 언젠가는 무수히 꽃필 한때를 상상하며 별이 지는 새벽까지 그림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하지만 70년대 초 컬러TV의 등장으로 극장이 쇠퇴기를 맞고 간판 일도 줄어들게 되면서 그는 광고 간판으로 사업방향을 돌렸다.

1980년대는 소극장의 전성시대였다. 대구 최초 소극장인 '푸른극장'을 시작으로 동성로에는 서울, 명동, 브로드웨이 등 동성로 150m 이내에 들어선 소극장만 15개가 넘을 정도로 소극장은 호황을 누렸다. 그리고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에게 '푸른극장' 인수 제의가 들어왔을 때, 상상도 해 볼 수 없었던 극장주를 꿈꾸며 부푼 희망에 가슴이 뛰었었다. 1992년, 그가 '푸른극장'을 인수하고 '동성아트홀'이라는 간판을 단 것은 그의 인생을 건 선택이었다. 하지만 5천만원이면 수리비용으로 충분할 거라는 말에 인수한 극장은 장마철이면 벽이 허물어질 정도로 비가 샜고, 지붕을 교체하고 내부시설을 수리하는 데만 그 몇 배가 넘는 돈이 들었다. 복합 상영관의 등장으로 소극장이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구청 관리자의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빚을 얻어 내부 시설을 교체한 다음이었다. 새로 뻗은 고속도로처럼 화려한 멀티플렉스 복합상영관들 사이에서 그가 인수한 극장은 좁다란 국도를 달리는 저무는 밤의 막차와 같았다.

사람들이 떠나간 정류장에는 하나 둘 불이 꺼지고, 창밖에는 영화의 엔딩 같은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길을 달리며 그는 마음속에 어떤 꿈을 다시 심어야 했을까? 어떤 꿈을 버려야 했을까? 종착지를 가늠할 수도, 그렇다고 뛰어내릴 수도 없는 캄캄한 길을 달리며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내려놓았을까?

포스터를 바라보는 그의 입속에서 조용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오월의 구름… 그래, 저 영화였지….'

저 영화였었다. 궁여지책으로 다시 개관한 제한상영관이 삼 개월 만에 문을 내린 후 남태우 씨로부터 예술영화 전용관에 대한 제안을 받았을 때가. 반신반의하며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변경을 하고 이곳을 알리기 위해 남태우 씨와 함께 백방으로 힘쓰던 때가, 그즈음 그가 자신의 영화관 객석에 앉아 처음으로 끝까지 지켜본 영화가 바로 누리 빌제 세일란 감독의 '오월의 구름'이었다.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40일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 시계를 사주겠다는 고모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알리. 하지만 40일이 되어 갈 무렵 동네 어른의 심부름으로 토마토 바구니를 들고 낑낑대며 언덕을 오르던 알리는 바구니를 떨어뜨리고 만다. 언덕 아래로 흩어지는 토마토를 줍기 위해 달리는 알리, 하지만 땅에 엎어져 주머니 속의 달걀은 깨지고, 알리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채 토마토 바구니를 내팽개쳐 버린다. 결국 알리는 닭장에서 훔친 달걀을 고모에게 내밀고, 그 달걀 속에서 껍질을 깨고 나오던 병아리가 인상적이었던, 삶에 대한 기대랄까 애착이랄까 그런 이름들에 슬그머니 다시 마음을 기울이고 싶게 만들던 영화였다.

당시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이던 남태우 씨는 일본 뉴웨이브 감독 특별전을 기획하며 필름 영사기가 남아 있는 영화관을 찾던 중 이곳을 찾아왔었다. 그리고 노인의 엎어진 토마토 바구니 위로 남태우 씨는 새로운 달걀 하나를 내밀었었다. 예술영화 전용관에 대한 제안이 그것이었다. 그로 인해 동성아트홀은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그 뒤 얼굴도 모르는 카페 회원들의 참여가 뒤따르면서 조용한 야간 버스 같던 극장엔 일이 년 사이 관객 수가 10배로 증가하는 기적이 일어났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회상하며 노인의 눈가에 따스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랬었지. 주머니 속 새 달걀에선 결국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왔었지…."

일 년 중 단 하루도 문을 닫지 않는 이곳에서 그의 휴식을 위해 무보수로 대신 일해 주는 카페 회원들, 직장에 다니면서도 극장 홍보를 위해 시간 나는 대로 시내를 돌며 영화 전단을 나눠주는 고마운 사람들, 그들은 남태우 씨가 건네준 달걀을 다시 주머니 속에 고이 품을 수 있게 만들어준 이들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젊은 여자의 구두 소리가 들린다. 노인은 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생각한다.

그래… 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흥행엔 실패했으나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저예산 독립영화처럼 많은 관객이 들진 않으나 어떤 이의 마음속엔 영원히 기억될 이야기,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귀 기울여 들으면 모험이 되고 사랑이 되고 꿈이 되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고 있는 영화라는 것을.

달걀을 건네주던 고모의 약속처럼 삶은 때론 꿈을 주고, 알리의 엎어진 토마토 바구니처럼 삶은 또한 절망을 주지만, 저편 울타리 안에서는 건강한 암탉이 홰를 치며 매일매일 새로운 달걀을 내놓는다는 것을, 때론 그것이 생을 아름답게 여기게 해 준다는 것을.

김계희(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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