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大幹 숨을 고르다 황악] 산꾼들 지팡이 내려 놓고 학의 궤적을 더듬다

영·호남·충청의 한복판…소통·화합·포용의 아이콘으로

"저 산 아래에도 가히 절을 지을 만한 길지(吉地)가 있다."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손가락으로 황악산(黃嶽山)을 가리키며 한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천500여 년을 거슬러 올라 아도화상은 선산 해평 태조산에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한 후 서쪽 방면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고 구전(口傳)으로 전한다. 이로써 황악산은 빛을 발하게 된다. 황악산은 태산준령이 아니요, 설악산(雪嶽山)이나 가야산(伽倻山)처럼 돌과 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아 바라만 보아도 절로 탄성이 나는 모습을 지니지는 않았다. 산세도 완만해 그저 평범하고 수더분한 이웃집 새댁 같다고나 할까? 이런 황악산은 아도화상이 곧게(直) 손가락(指)으로 가리킨 뒤 천년 고찰 직지사를 품게 되고 새로운 변신을 시작한다.

마치 김춘수 님의 시(詩)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처럼 말이다.

◆산은 산이요

요즘 산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예전에는 꽃 피는 봄이나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에 주로 산을 찾았다. 그러나 이젠 계절을 가리지 않고 산은 사람들의 물결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우리 민족은 산과 무척 친하다. 굳이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수치를 들지 않아도 산이 없는 풍경을 상상할 수 없다. 어디를 가든지 작든 크든 산과 마주하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산이 다가와 인사한다. 해와 달이 산에서 뜨고 지는 모습에 익숙하다. 최근 아파트 숲에 막혀 산과 거리가 조금은 멀어졌다. 그래도 산이 언제나 이웃하고 있다. 그래서 친숙하다.

먼 조상 때부터 산자락에서 태어나 산에 의지해 살다가 죽으면 산에 묻혔다. 산과 더불어 살고 죽는 것이다. 산은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와 일상생활, 그리고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산의 험준함과 속 깊음은 신비감과 종교적 심성을 안겨 준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또 산은 사상의 고향이다. 신라 화랑들은 산을 누비며 심신을 단련했다. 조선 사대부들은 산속에서 사색과 독서를 통해 학문을 연마했다. 지금은 산이 레저와 스포츠의 공간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산은 산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시대에 따라 기능과 역할은 다르게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매일, 황악을 품다.

임진년(壬辰年) 새해에 매일신문과 황악산이 만난다,

매일신문은 산과 인연(因緣)이 깊다. 최근 '雲門(운문)에서 華岳(화악)까지'(2010년)를 연재했다. '相生(상생)의 땅, 가야산'(2007'2008년), '八公山河(팔공산하'2005년) 등 영남의 명산들이 매일신문을 통해 독자들과 만났다. 새해에는 황악산이 독자들을 찾아간다.

황악산은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군의 15리에 있는데, 공정왕(조선 정종)의 어태를 산 서쪽 직지사의 봉우리에 안장하였다"고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북 영동군, 서쪽으로 전북 무주군, 동남쪽으로 경북 김천시 등 3도, 3개 시'군과 접하고 있다. 한반도 백두대간에 속하며 그것도 한반도 남단의 한가운데 자리한다.

백두산에서 치고 내려온 웅혼한 기상은 백두대간을 이루는데, 동해를 따라오다 소백산에 이르러 내륙으로 기세를 돌리고 영남의 관문 추풍령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어 다시금 서남쪽으로 내달리다 힘차게 솟구치니 바로 천년고찰 직지사를 품고 있는 황악산(黃嶽山)이다.

황악산은 산 이름을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중용(中庸)의 원리에서 따왔다고 한다. 청(靑), 적(赤), 백(白), 흑(黑)과 함께 오방색(五方色)의 하나인 황(黃)은 동서남북의 시작인 동시에 종착지인 중앙을 의미한다. 또 으뜸을 나타내기도 한다. 황악산의 높이가 1,111m로 1이 네 개나 들어 있다. 1은 최고, 으뜸을 의미하는데 황악의 명칭과 높이는 기연이 아닐 수 없다.

또 악(嶽)은 주로 설악 '치악 등 바위가 많고 험준한 산에 붙이는 이름인데, 사실 그리 높지도 않고 평평한데다 암봉이나 절벽 등이 없어 산 전체가 그다지 험하지 않은 황악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산에 학이 많이 날아들어 황학산(黃鶴山)으로 불렸는데, 학(鶴)이 고고하고 여유롭기는 하나 지나치게 연하고 부드러움을 경계하여 악(嶽)을 산 이름에 넣었다고 하니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움이 묻어 있다.

◆불교를 꽃피우게 한 산

황악산은 천년고찰 직지사를 품에 두고 있다. 황악산과 직지사는 떼어내 얘기할 수 없다. 아도화상의 손끝을 따라 직지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로부터 뿌리내린 신라불교는 국운 상승의 기회로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고려 왕건은 주지 능여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견훤과의 불리한 싸움에서 승리한다. 직지사는 이 인연으로 호국불교의 도량으로 자리를 굳건히 한다. 또 자장법사, 천묵대사 등 큰스님이 직지사에 안거하면서 불교가 신라 천 년을 넘어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신앙적 모태로서 생활 속에 깊숙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승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신묵화상의 인도로 17세에 출가해 주지를 지낸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직지사는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사명대사와 인연이 있는 사찰이라 하여 불을 질러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는 화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절 이름이 담은 선종(禪宗)의 가르침인 '直指人心 見性成佛'(직지인심 견성성불)처럼 어느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수양의 도량으로 황악산과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화합'소통 그리고 포용의 공간

황악산은 인근 삼도봉과 함께 충청'전라 그리고 경상도의 3도(道)에 걸쳐 있다. 삼도봉과 황악산은 지역 화합과 소통의 상징이다. 산 아래 주민들은 산을 이웃하고 있지만 언어와 풍속이 달라, 가까이 있지만 너무 먼 이웃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함께 모여 공동 번영의 장으로 승화하기 위해 마음을 합쳤다. 화합과 소통의 삼도봉 행사는 매년 10월 번갈아 가면서 22년째 열리고 있다. 말과 생활풍속이 다른 이질성을 극복하고 이제는 이해와 화합의 마음으로 불통에서 소통으로 다 함께 사는 깨달음을 주고 있다.

혹자들은 황악산을 어머니 산이라 말한다. 한반도 남단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지만 부드럽고 화려하지 않고 수더분한 산세가 백의민족의 어머니 상(像)과 흡사하다는 것. 이는 구중궁궐의 한가운데에 궁궐 안주인인 왕비의 거처 중궁전(中宮殿)이 있어 궁내 모든 것을 주재한 것처럼 황악산은 국토의 남단 백두대간의 중앙에 있어 모든 것을 포용하고 녹여내고 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는 말이다.

◆지팡이를 내려놓은 황악산

겨울 황악산의 칼바람은 차기로 이름이 높다. 백두대간 첩첩산중을 통해 몰아친 찬 기운이 추풍령을 넘어 넓은 금릉평야를 만나면 반가우면서 괜스레 심술을 부리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우리 주변이 많이 혼란스러울 모양이다. 나라 안에서는 총선과 대선 두 차례 큰 선거가 치러진다. 선거 때면 으레 이념'지역 간 갈등이 표출돼왔다. 더구나 최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한반도 안보정세는 한층 국민들의 걱정거리로 더해질 전망이다. 여기다 유럽발 금융위기는 새해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여 가뜩이나 위축된 서민들을 더 힘들게 할 것 같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하지만 산행을 하다 보면 힘들고 지칠 때는 재충전을 위해 쉬어가야 한다. 그래야 탈없이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많은 산악인들이 지리산에서 설악산까지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다. 백두대간 가운데 있는 황악산은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그래서인지 백두대간 중간인 이곳에서 무사고 완주를 바라는 기원제를 갖는 이들도 상당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처럼 올 한 해 동안 바쁘지만 걸음을 멈추고 지팡이를 내려놓고 쉬어가는 여유로움으로 한 해를 열었으면 한다. 가쁜 숨을 갈무리하면서 황악산 주변의 풍광을 조망하고 산을 통해 선현들의 슬기로움을 배워 화합과 소통의 장을 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 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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