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우리나라에 방영된 미국 드라마 '뿌리'는 미국의 흑인 노예사를 밀도 있게 다룬 작품으로 유명하다.
뿌리의 원작자 알렉스 헤일리는 자신의 7대조 할아버지(쿤타 킨테) 이야기를 통해 흑인 노예들의 200년 역사를 소설로 엮었다. 9년간 자신의 가족사에 대한 조사와 연구, 집필 과정을 거쳐 탄생한 뿌리는 TV 방영(1977년)된 이후, 미국인들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더욱 주목을 받았다. 미국인들은 이 소설(드라마)로 자신들의 역사를 노예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부당한 제도적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 정신, 자유의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한 노예의 가족사가 미국인들에게 시민사회에 대한 관점과 의지를 가르쳐 준 것이다. 특히 뿌리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고통과 상처로 굴절된 인물들의 생애사를 통해 미국 근대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 한 생애 속에 담긴 이야기야말로 그 사회 혹은 지역의 진정한 역사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구에서는 생애사 혹은 가족사를 통해 자신의 삶과 지역사를 정리해 보는 뜻 깊은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의 '생애 열전 100인' 사업, 칠곡 평생교육문화회관의 '기억으로 쓰는 칠곡 이야기', 수성구 창의체험센터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가족 생애사 쓰기' 등 가족과 지역 어르신들의 생애 이야기를 구술로 직접 기록하고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생애 열전 100인'의 경우 중구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분이나 기억을 갖고 계신 어르신 100인의 생애를 구술로 기록하고 책으로 발간하는 사업이다. 인간의 생애로부터 지역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이 새로운 관점은 지역 재생의 또 다른 방향이 되었다. 사업의 대상자는 대부분 칠십이 넘은 노년의 어르신들이다.
지난 영광의 시대와 고난의 세월 뒤에 있는 눈물의 개인사와 지역 이야기가 주로 구술되었다. 이를 조사한 연구 공동체 '두루'의 연구원들은 그들의 눈물과 증언, 생의 작은 결들을 듣고 기록했다. 기억과 증언의 상한(上限)은 70년이라 한다. 이 기록 사업은 어쩌면 그분들의 생애 마지막 증언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이 작업은 개인의 역사가 시대와 지역 역사의 단면이 되고 역으로 시대의 역사가 개인의 역사 속으로 틈입하는 과정의 기록이었다.
대구 초대 시장 '허억' 선생의 딸로서, 참고 인내하는 여성의 삶을 보여주신 허귀진 할머니, 교육자로서 역사의 전면을 살아온 박두포 교수, 대구의 초등교육과 교회사의 증인 강석교 장로, '곡주사'의 주인으로 지역 대학생과 학생운동의 이모로 살아온 정옥순 씨, 북성로에서 노점상으로 시작해 북성로 공구의 역사가 된 배상용 씨 등의 생애와 지역 이야기가 이제 기록 속에 담겼다.
한편 중구 도심문화재단에서는 '자술 생애사 아카데미'도 열었다. 아카데미를 통해 자신의 생애를 스스로 기록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 생의 한고비를 지나온 참가자들의 생애는 가장 속 깊은 우리들의 지난날이며 앞으로 살아갈 우리들의 정체성이다.
수필가로 약사로 명강사로 알려진 하오명 씨, 근대골목에 대한 기억을 꼼꼼히 정리하신 최찬식 선생, 대구 타월 산업의 역사를 꿴 이윤환 씨, 봉봉라사 40년 인생을 쓴 곽종한 씨 등 여덟 분의 생애가 자서전으로 정리되었다.
사람의 생애를 듣고 기록하는 일은 단순한 녹취와 기록의 의미를 넘어선다. 생애 속에는 개인의 희로애락과 삶의 노고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생애가 한 권의 구술 자서전으로 복권될 때 우리는 영웅 서사보다 더 깊은 인간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영웅 서사에는 없는 속 깊은 감정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듣게 된다. 구술 생애사는 영웅보다 범부(凡夫)의 이야기이며 지역의 작은 골목길 같은 생활 속 이야기이다.
그 골목길에 손때 묻히며 살아온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들의 뜨거운 생애의 기록, 그것은 곧 대구에 대한 열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박승희 영남대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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