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의료는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대구에 들어온다. 먼저 1899년 12월 문을 연 '제중원'으로 훗날 동산병원으로 발전한다. 미국화된 영국 및 프랑스류의 서양의학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것이다.
아울러 일본화된 독일류의 서양의학을 배운 일본인 의사들이 대구에 등장했다. 1904년 12월 27일 경부선 철도가 완공되면서 대구에 사는 일본인들이 차츰 늘어났고, 대구에 정착해 개업한 일본인 의사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경북대병원의 연원(淵源)이 되는 동인의원(同仁醫院)이 일본인 의사들에 의해 1907년 2월 10일 문을 열었다. 물론 이런 역사적 시각에 대한 논란도 제기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경북대학교병원사'(2000년 5월 발행)의 기록에 따르기로 한다.
◆1904년 일본 의원 첫선
서울이나 부산'인천'원산 등 초기 개항장과는 달리 대구에는 일본인 의사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늦었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877년 일본 해군은 부산에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열었고, 1880년 원산에 관립 생생의원(生生醫院), 1883년 인천에 총영사관 부속 관립병원을 열었다. 서울에도 광제원이 설립됐고, 1897년 무렵 개인 의원도 들어섰다.
대구에 처음 일본인이 살았던 시기는 1893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해 9월 오카야마현 출신인 히차츠케와 무로라는 일본인 2명이 대구읍성 남문 안에서 의약품 및 잡화 판매 상점을 열었다고 한다. 이들은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이 벌어지자 일본군에 고용돼 통역과 의무(醫務)를 담당했다고 한다. 경북대병원 사에 따르면, '의약품 판매와 잡화상을 경영했던 이들이 일본제 신약(新藥)의 판매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불법적으로 의술을 펴기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나와있다.
제대로 형태를 갖춘 의원이 문을 연 것은 이로부터 약 8년쯤 뒤다. 먼저 1903년 경부선 철도 부설공사가 진행되면서 대구에 사는 일본인 숫자가 늘기 시작했고, 1904년 6월 무렵에는 일본인 숫자가 1천 명을 웃돌았다. 대구에 일본인 의원이 최초로 문을 연 시기도 1904년이었다. 남문 내에 야마와키의원, 북문 내에 나스의원 등 2곳의 일본 의원이 진료를 시작했다. 일본인들에 대한 진료가 주 업무였고, 조선인 진료도 이뤄졌다. 그나마 의약품과 진료설비를 갖춘 첫 의원의 등장이었다.
◆일본 동인회, 의사 파견
경북대병원의 출발점으로 보는 대구 동인의원은 일본 도쿄에서 조직된 동인회(同仁會)라는 단체의 지원을 받아 설립됐다. 경북대병원사는 동인회에 대해 '일제의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들 지역 민중들에게 의료 혜택을 베푼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던 또 하나의 침략기구'라고 기술하고 있다. 동인회는 중국과 조선에 대한 의학'의술 보급이라는 목적을 겉으로 내세우며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04년부터 일본인 의사들을 파견했다.
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이 터지자 일본은 경부선 철도 공사를 무리하게 강행했다. 이런 과정에서 수많은 부상자가 나왔고, 일본인 공사 책임자들이 말라리아'장티푸스'이질 등에 시달리게 됐다. 동인회는 회원인 후지나와 분준 등의 의사를 철도의(鐵道醫)라는 명목으로 파견했고, 이들은 철도 공사장을 따라 이동하며 환자를 치료했다.
1904년 11월 경부선 완공을 앞두고 동인회는 대구를 비롯해 전국 5곳에 철도 의가 상주하도록 했고, 후지나와 분준에게 대구를 책임지도록 했다. 후지나와는 우선 임시로 자기 진료소에 '동인의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진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음대로 이름을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며, 동인회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지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07년 2월 10일 동인의원 개원
이듬해인 1905년 여름 동인회 부회장 가타야마는 서울로 가던 중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후지나와에게 대구동인의원 신설에 대한 일체를 위임한다는 언질을 남겼고, 이에 고무된 일본 거류민과 대구지역 유지들은 후지나와를 앞세워 대구동인의원 설립을 동인회 본부에 요청했다. 후지나와는 경부철도주식회사로부터 건축비 5천엔을 예약받기도 했다.
1906년 여름 동인회 부회장 사토 스스무가 대한의원 창립위원장이 돼 서울로 가는 도중 대구에 들러 동인의원의 부지를 선정해주었고, 건축비 조달에 관한 사무절차도 알려주며 설립을 공인했다. 그해 8월 대구동인의원은 건물 기공식을 가졌고, 공사비 2만1천엔을 들여 12월 완공했다. 그리고 1907년 2월 10일 개원식을 하고 본격적인 진료에 나섰다.
당시 동문정(東門町)에 위치한 동인의원은 단층 목조 건물이었다. 현재 위치로는 중구 동문동'문화동'완전동의 교차부 일대이며 대지 면적은 1만6천㎡(4천845평)에 달했다. 초대 원장으로 도쿄대 출신 이케가미 시로가 부임했고, 경영을 담당한 부원장은 후지나와 분준이 맡았다. 이 밖에 의사 2명과 약제사가 별도로 있었고, 전체 직원은 30명에 달했다.
◆평양 동인의원보다 활발
동인의원은 내과'외과'안과'산부인과의 4개 과로 출발했다. 매일 외래 환자 7~8명, 입원환자 30~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고, 조선인을 위해 특별히 온돌방 5개를 설치했다고 한다. 약값, 입원료, 수술료, 왕진료는 환자가 부담했지만 실비만 받는다는 방침을 세웠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진료나 천연두 예방을 위한 종두접종은 무료였다.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존슨이 고군분투했던 '제중원'에 비해 상당히 체계를 갖추고 시작한 셈이었다. 1910년 상반기까지 진료 통계를 평양동인의원과 비교해 보면 대구가 훨씬 활발한 의료 활동을 펼쳤다. 1908년 외래환자는 대구 4천359명, 평양 846명이었고, 1909년엔 대구 3천577명, 평양 1천521명, 1910년 상반기엔 대구 4천399명, 평양 1천121명이었다.
이유는 분명치 않다. 다만 '대구동인의원의 명성이 높아져 부산'마산'영동'대전 지역 환자까지 이곳에서 진료를 받았다'는 기록은 남아있다. 경부선 통과 지역의 환자들까지 대구동인의원을 찾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대구동인의원은 매년 적자를 기록했다. 경북대병원사에는 '1908년을 제외하고는 적자 경영이 계속됐다. 그럼에도, 경영을 지속했던 것은 일제의 침략 및 식민지 지배 정책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와있다. 동인의원이 적자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한국인에게 오로지 인술을 베풀었던 결과라고 선전했다는 것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 = 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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