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나오자 사람이 변했다. 샌님 같은 점잖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춤꾼의 본색이 드러났다. 똑바른 자세와 은근한 눈빛 그리고 유연하면서 정확한 동작으로 파트너를 리드했다. 영락없는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
댄스 경력 13년. 블루스, 자이브, 차차차, 맘보 등 안 되는 것이 없는 정병진 (78'대구 수성구 만촌1동) 씨는 대구시 노인종합복지관의 인기 맨이다.
자칭타칭 '브루스 정'으로 불리는 그는 멋진 춤꾼이기도 하지만 정작 모두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남을 위한 따뜻한 배려 때문이다. 복지관 입구의 교통정리를 시작으로 화단 가꾸기, 쓰레기 줍기, 청소 등을 도맡아 하고 있다.
1999년 중학교 교사로 퇴직해 이듬해부터 춤을 배우고 봉사활동을 시작한 정 씨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무엇을 하면서 즐겁게 보낼까'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고 한다. 원더풀 라이프를 위해서다.
세월도 나이도 잊게 만드는 그의 셀 위 댄스. 슬~슬~ 리듬을 타며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 춤을 추게 됐나.
"퇴직 후 집에서 놀아보니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친구의 소개로 간 복지관에서 파티댄스를 보고 첫눈에 빠졌다. 운동도 되고 무엇보다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내 안의 끼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순서를 익히며 정확한 동작을 해야 하는 것도 교직생활을 오래한 나에게 잘 맞았다. 어느덧 13년이 흘렀다."
-부부가 함께하는가.
"아니다. 집사람은 춤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복지관에서 연결된 춤 파트너와 13년 동안 같이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이러다 보니 이젠 눈빛만 봐도 무얼 원하고 있는지 안다. 춤에 관해서 말이다.(웃음) 한 파트너랑 10여 년 같이 추면서 서로 양보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배우게 됐다."
-부인 입장에서는 다소 신경 쓰일 수도 있겠다.
"가끔 여자 파트너가 전화를 하는 경우가 있다. 집에 일이 생기거나 연습 문제로 의논할 때다. 집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바꿔준다. 이 나이가 되면 서로 믿고 살아간다. 파트너는 그냥 춤추기 위한 상대일 뿐이다. 우리 부부는 서로 노 터치다. 집사람은 집사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나는 나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리고 집안일도 역할 분담이 잘돼 있다. 설거지는 내 차지다."
-작년에는 댄스경연대회에서 상도 받았다던데.
"시니어댄스경연대회가 매년 열린다. 지난해에는 우리 팀인 '원더풀 라이프 댄스팀'이 대구 대표로 뽑혀 본선에 올라갔다. 여기서 4등을 했는데 대구팀이 이렇게 좋은 성적을 올린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평균연령이 70이 훌쩍 넘어 다른 지역 팀에 비해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작년에 대회를 위해 2개월 정도 별도의 연습을 했다. 단원은 20명이다."
-봉사단 단장도 맡고 있다.
"복지관 봉사단원으로 10년 이상 활동했다. 올해 3월부터 단장을 맡고 있다. 큰나무봉사단에서는 모내기, 사과 따기 등 농촌일손 돕기를 하고 낙동강변에서 휴지도 줍고 나무도 심는다. 한 달에 한 번 신체 활동이 어려운 어르신들이 계시는 곳에 찾아간다. 이야기도 나누고 몸도 씻겨 드린다.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여기서 많은 것을 배우고 더 큰 기쁨을 얻는다."
-노노(老老)케어에 역점을 두는 듯하다.
"노인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노인이다. 그들과 주기적으로 만나고 전화하면서 말 상대가 되어 드린다. 외로움에 많이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과자를 사들고 집으로 가면 아주 반긴다. 장기나 바둑도 같이 두고 가끔 노래도 부른다. 자녀들의 이야기도 듣고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눈다. 노인들에게는 말 상대가 가장 필요하다. 그걸 해주고 있을 뿐이다."
-복지관에 가장 먼저 출근한다고 들었다.
"아침이면 복지관 앞이 복잡하다. 하루 1천여 명의 노인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그렇고 특히 노인들은 앞만 보고 가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할 수도 있다. 교통정리를 하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선다. 교직에 있을 때도 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습관이 됐다. 교통정리를 하고 나면 화분에 물 주고 쓰레기 줍고 주변을 정리한다. 이왕이면 깨끗한 환경이 좋지 않은가.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행복하다."
-손재주가 좋아 윷도 만든다는데.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만들면 모두들 칭찬했고 좋다고 했다. 등산을 갈 때면 죽은 나무들을 주워와 윷으로 만든다. 나무를 다듬고 니스 칠을 하고 그 위에 좋은 글을 새긴다. 여기에다 나무로 일일이 잘라 만든 윷말을 함께 선물한다. 지금까지 300개 정도 제작한 것 같다. 3년 전부터는 솟대를 만들고 있다. 박경리 작가의 생가에 있는 솟대를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만들어 복지관에 선물했더니 모두들 갖고 싶어 했다. 이틀 정도 꼬박 정성을 기울이면 솟대 하나가 만들어진다. 선물 받은 사람들은 팔아도 되겠다며 좋아한다. 무엇이든지 나누면 기쁨은 배가 된다."
-앞으로 꿈은.
"현상유지다. 그냥 지금처럼 춤도 추고 남을 위해 가끔씩 시간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꿈은 없다. 1남2녀 자식들 모두 건강하게 잘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다른 일도 많이 하는 것으로 들었다.
"기회가 주어지면 무조건 '예스'라고 답한다.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가고 싶어서이다. 그러다 보니 일 할 기회가 많아졌다. 교사 출신이어서 방과 후 수업하면서 다문화가정의 어린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고 이웃의 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수성구청의 시니어식품감시원도 맡아 바쁘게 지낸다. 무엇이든지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길은 있다. 나이 들었다고 기죽지 말고 눈치 보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어떻게'라는 생각만 버리면 많은 것을 즐길 수 있고 누릴 수도 있다. 기회도 온다."
-언제까지 춤을 출 건가.
"오늘도 4시간 이상 춤을 췄지만 끄떡없다. 지금 같아서는 10년은 더 출 수 있을 것 같다. 최고령 댄서? 그것도 괜찮겠다. 하하하."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김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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