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대구 여대생 살인범 그 이후

대구 여대생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잡혀 엊그제 현장검증이 실시됐다. 범인은 공익근무 요원으로, 밤에는 사설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온 것으로 확인됐다. 주말과 새벽에는 종종 클럽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의 일상만 보면 평범한 요즘 젊은이다. 그런 그가 밤늦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성실하게 살아온 또래의 여대생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성폭행을 시도하다 반항했다는 게 이유의 전부다.

시민들은 동기와 결과의 인과관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분노한다. 검증 현장에 500명의 주민이 몰려 범인에 대한 경멸과 적의를 쏟아냈다. 그중 일부는 범인의 평범한 모습에 놀랐다. 범인과 이웃인 한 여대생은 "바로 옆집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이 분노와 놀라움의 뒤끝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무서운 세상이야"라는 어느 시민의 말처럼, 내가 피해자로 자연선택당할 수 있다는 불안이 그다음 순서 일 것이다. 그리고 '난 아니야'라는 확률의 위안과 이 험한 세상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과 더불어 사건 자체가 잊힐 것이다. 이 사건을 단지 지독히 음란한 한 젊은이의 성적 충동의 파국적 우연으로 이해하는 한 말이다.

나는 성 전과자의 범행을 확신했다. 나중에 이 확신은 사실로 확인됐다. 범인은 음란물 마니아로 아동 성추행 전과가 있었다. 2011년 울산에서 미성년 성추행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의 범인을 성 전과자로 단정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이 격분한 바로 그 사실, 범행 동기의 사소함과 수법의 잔혹함 사이의 채워지지 않는 괴리 때문이다.

이 사건을 접한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의 성적 쾌락을 위해 사람을 그렇게 무참하게 살해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범인이 성적 쾌락을 위해 살인을 무릅쓰는 위험을 감수했다면 그는 인간의 지능이라고 할 수 없다. 엊그제 보도된 '가출 소녀에게 피임약까지 먹이며 성매매 강요' 기사를 보라. 10대 소녀 2명을 조폭이 납치해 6개월간 성매매를 강요하는 사이 남성 751명이 성매수를 했다. 그들이 지불한 돈은 10만 원. 성관계 자체가 금지된 미성년의 성조차 10만 원에 매수가 가능한 현실이다. 누군들 단돈 10만 원과 살인의 위험을 맞바꾸겠는가.

상습적 성폭행범이 추구하는 것은 성적 쾌락이 아니라 좌절된 권력의지의 충족이라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애원하는 피해자를 통해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자신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좌절이 깊을수록 성폭행을 통해 권력의지를 추구하고자 하는 성향은 강해진다. 반항하는 피해자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자신을 좌절시킨 사회에 대한 적대감이 순간 피해자에게 전이되기 때문일 것이다. 범인은 말하지 않는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성폭행에 대한 사회적 대응으로 처벌 강화나 화학적 거세가 불완전한 것은 성폭행의 동인이 성욕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욕이 발단은 되겠지만 살인에 도달하는 근원적인 동인은 좌절된 권력의지의 히스테리적 분출이다. 그래서 어설프게 감옥에 가두었다가 풀어주면, 삶이 점점 망가지면서 더 강력한 범행으로 돌아온다. 처벌보다 치료가 더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성폭행은 생물학적이며,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이다. 조절 능력이 떨어지는 뇌와 사회적 조건이 결합한 결과다. 성폭행범의 유전자와 가족사에 사회가 개입할 순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뿐이다. 성폭행은 사회적 좌절감을 불특정 다수에 투사하는 적의가 약자인 여성을 향할 때 발생한다. 가혹한 경쟁 체제, 일상의 폭력적인 갑을 관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왜곡된 남성주의가 그 모태가 될 수 있다. 이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성폭행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시작은 이런 사회적 조건을 조성하는 데 일조한 개별적 행위를 성찰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10대 소녀를 성매수하는 것과 같은 짓거리와 단호히 결별할 때, 대구 여대생 같은 성폭행 살인 피해자는 실질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 그것이 자연선택의 불안과 험한 세상을 마주하는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멀지만 가까운 길이다.

남재일/경북대 교수·신문방송학과 comma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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