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뒤 한의학에 대해 일본 본토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정책을 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한의학의 말살을 꾀한 동시에 취약한 의료여건을 감안해 일정 부분 역할을 맡겼다. 일제강점기 말기로 접어들며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약품, 의료인 등이 크게 부족해지자 필요에 의해 한의학을 인정하기도 했다.
◆한의사 지위 낮추고, 한약종상은 인정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 초반 관련 법령을 발표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한의학에 대한 입장을 드러냈다. 먼저 한의사를 단계적으로 없애기로 했다. 한의사가 돼서 이미 진료 중인 사람은 예외로 두고, 신규로 한의학 교육을 하거나 면허를 주는 것은 억제하는 방법을 택했다. 신규 면허조차도 5년간 유효한 임시면허를 줘서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려고 했다.
아울러 한의학을 서양의학보다 아래에 두고자 했다. 서양의학 시술자를 의사(醫師), 한의학 시술자를 의생(醫生)이라고 규정한데서 알 수 있듯이 양의사는 스승이고, 한의사는 다시 의학을 배워야하는 학생 정도로 봤다. 한편 침구사나 안마사는 유사의료인으로 봐서 그들의 지위를 인정했다. 한약재를 매매하는 한약종상의 진료행위도 인정했다. 당시엔 도회지나 제법 큰 읍 단위에 가야 한의사라도 만날 수 있었고, 대부분 농촌 주민이나 서민들의 유일한 의료인은 한약종상뿐이었다.
일본은 본토와 비슷한 한의학 정책을 조선에도 적용했다. 그러나 조금씩 차이를 두었다. 먼저 한의사를 없애는 방침은 동일하다. 하지만 일본과 조선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일본에서는 이미 면허를 가진 사람은 일생동안 의사 면허로 의료활동을 보장하고 신규 면허를 아예 없앤데 비해, 조선에서는 의생으로 한 단계 낮춰 인정했고 비록 5년마다 갱신이 필요하기는 해도 신규 면허를 발급했다. 의료사각지대인 농촌과 서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약종상을 그대로 둔 점도 달랐다.
일본은 왜 조선에는 다른 한의학 정책을 편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겉으로는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내세웠지만 결국 근본적으로 조선을 열등하게 봤기 때문이다.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의학전문학교를 만들고도 그곳의 졸업생들이 조선, 만주 등 식민지에서만 의사로 활동할 수 있고, 일본 본토에서는 면허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울러 조선에 대해서는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서양의료를 근간으로 한 의료체계를 만들 의지도 없었고, 그런 자본도 없었다.
◆의생 지위 갈수록 열악해져
의생에 대한 관리는 점차 엄격해졌다. 그만큼 의생의 지위가 열악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면허지역이 한정됐고, 면허를 다시 받아야 하는 기간도 짧아졌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의생 면허 권한을 조선총독에서 도지사로 바꾸었다. 쉽게 말해 의생이 아무 곳에서나 의료활동을 할 수 없고 특정 도(道)에서만 개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1922년부터는 지역이 더 좁아져 도에서 면(面) 단위로 바뀌었다. 의생들이 인구가 많은 도회지가 아니라 시골에서 진료하도록 제한한 것이다.
의사(양의사)들에게도 이런 제도가 있었다. 이미 1913년부터 한지의업자(限地醫業者)를 두어 산간 벽지의 의료를 담당하게 했다. 정해진 지역에서만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의 한지의(限地醫)는 정규의사가 아니고 보통 의사를 도와 조수 일을 하면서 도제식으로 의술을 배운 사람들이다. 도 위생과 시험을 통과하면 일정 지역에서만 개업할 수 있었다.
의생과 한지의는 특정 지역에 제한을 두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근본 출발점은 달랐다. 한지의는 지역 제한이 없는 의사와는 별도로 면허를 부여한데 비해 의생은 처음 면허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지역 제한을 두었다. 필요에 의해 의생을 두기는 했지만 의사에 비해 열등하다는 시각은 여전했던 것이다. 게다가 1920년 3월부터 신규 면허의 유지기간이 5년에서 3년으로 줄었다. 보건 당국이 의생을 더 쉽게 통제한다는 뜻이다. 특정 지역을 벗어나면 곧바로 면허를 취소했다.
일제의 탄압 때문에 결국 의생을 비롯한 한의학 종사 인력은 차츰 줄어들었다. 새로 진입하는 의생보다 숨지거나 면허를 취소당해서 퇴출되는 의생이 훨씬 많았다. 의생은 1914년 5천827명에서 1943년 3천327명으로 절반가량 줄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의생의 노령화였다. 의생 규칙이 발표되던 시점인 1914년 무렵 의생의 70%가량은 40대 이후였다. 그런 상황에서 신규 면허를 억제하고, 개업지역을 제한하고, 면허 갱신기간을 줄이는 등 탄압을 가한 탓에 급격히 의생이 준 것이다.
◆여전히 대다수 민중은 한의학에 의존
의생은 크게 줄었지만 한의학이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농촌뿐 아니라 산간벽지 주민, 서민층 의료를 담당한 것은 약재를 거래하고 약을 지어 판매하는 한약종상이었기 때문이다. 1914년 조선인 약종상 개업자는 7천601명이었고, 1936년 말에도 한약종상은 7천988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숫자는 당시 의생 3천739명의 두 배를 웃도는 것이다.
약종상들은 대개 벽지에서 싼 값으로 약을 공급하는 인력들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 대부분 서민들의 의료는 한약종상이 맡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반 사람들은 양의사를 찾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도시에나 나가야 의사를 만날 수 있었고, 진료비도 워낙 비쌌기 때문에 웬만한 질병은 한약종상을 찾거나 민간요법에 의지해야 했다.
실제로 충남 당진군 송옥면 오곡리 마을(농가 61가구)의 보건 의료에 대한 1940년 조사 자료를 보면, 1년간 마을에서 발생한 786건의 의료상 문제에서 한방을 이용한 경우가 200건으로 가장 많았고, 초목을 이용(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약용 풀과 나무로 치료)한 경우가 187건에 이르렀다. 형편인 어려운 빈민들은 가족이 아파도 의사나 의생을 찾을 수 없었고, 한약종상에게 약을 사는 것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민간요법에 의지하거나 귀신에게 비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도립병원이 있었던 강원도 강릉 지역에 대한 1930년 자료에도 주민 대부분이 한의를 이용했다고 나와 있다. 의료를 이용한 것이 있다고 조사된 28가구 중에서 25가구가 한의를 이용했고, 이들 중에 양의도 이용한 경험이 있다는 답은 4가구 뿐이었다. 그나마 강릉에는 도립 강릉의원과 함께 의원 3곳에, 의사가 7명이나 있어서 의료기관 이용이 편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생이 20명에 달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접근하기 훨씬 편했던 곳은 아무래도 한의일 수밖에 없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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