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 시조로 푼 한시] 浮碧樓/ 이색

돌은 오래고 구름은 천년을 흐른다

선현들이 남긴 시문에는 대체적으로 특징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음풍농월의 시풍이요, 다른 하나는 과거회상적인 시풍이 그것이다. 자연을 노래하고 달을 희롱하는 시의 형태와 고적'사찰을 찾아 융성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시적 형태다. 고려의 절신(節臣)인 목은이 평양의 '영명사'를 지나 '부벽루'에 올라 과거를 회상하는 시문을 본다. 고구려의 찬란했던 역사를 회상하며 달은 예나 같이 비추고, 구름은 천년을 흐른다고 하며 읊었던 율시 전구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영명사를 지나다가 부벽루에 올랐더니

성터는 텅 비었고 한 조각 달빛 가득

구름은 천년을 흐르나 오래된 돌 홀로 있네.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작과영명사 잠등부벽루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성공월일편 석로운천추

【한자와 어구】

永明寺: 부벽루 서쪽에 있던 절.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지은 아홉 절 중의 하나/ 暫: 잠시/ 浮碧樓: 평양 모란대 밑 대동강가에 있는 누각/ 城空: 성은 비었다/ 月一片: 달은 한 조각, 곧 초승달이나 하현달임을 뜻함/ 石老: 오래된 바위. 千秋: 천년, 오랜 세월.

'돌은 오래고 구름은 천년을 흐른다'로 제목을 붙여본 율(律)의 전구인 오언율시다. 작자는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으로 고려 말 문신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엊그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더니/ 성은 비었는데 달은 한 조각이요/ 돌은 오래되었고 구름은 천년을 흐른다'라고 번역된다. 한 선비가 평양 금수산 기슭에 자리 잡은 영명사를 찾았다. 평양지역 전승에 따르면 '천손' 주몽이 이 근처 동굴에서 기린(麒麟)을 길렀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영명사에 대한 애정과 추억은 남달랐을 것이다. 부벽루도 마찬가지다. 추억과 역사의 애환을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말이 없다.

시인은 행여나 하는 기대를 갖고, 천년사직의 옛일을 누가 이야기해주지 않겠나 하는 기대를 갖고 영명사를 찾았고 부벽루에 올랐다. 그러나 허무함만 느끼고 있다. 화자의 눈에 비친 천년의 사직은 텅 비었음을 상상한다.

다만 한 조각의 달과 한 점의 구름만이 천년의 얼을 말해주고 있다고 회고하면서 시상을 일으킨다. 후구로 이어지는 시인의 상상력은 '기린마는 가고 오지 않으니/ 천손은 어느 곳에서 노는가/ 돌난간에 기대어 휘파람 부는데/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는구나'라고 했다. 동명왕이 탔던 기린마와 천손은 보이지 않는데 강물만 흐른다고 했다.

이색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문정(文靖). 1341년 진사가 되고, 1348년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으로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 부친상으로 귀국, 1352년 공민왕에게 전제(田制) 개혁'국방 강화'교육 진흥'불교 억제 등 당면 정책을 건의했다.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해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했다. 이후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했고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일등공신이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정몽주'이숭인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아들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 유배됐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김종직'변계량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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