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매국노 이완용 찌르고 24세 순국한 이재명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伸張)하리라."

평양에서 태어난 이재명(李在明·1886~1910·사진)은 1904년 미국의 노동이민회사 모집에 응해 하와이에 들렀다 1905년 을사늑약 뒤 1906년 미국 본토로 갔다. 미 샌프란시스코에선 1905년 안창호 중심의 공립협회가 창립돼 항일운동 중이었다. 협회에 가입한 그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뒤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등 일제 폭거에 협회가 매국노 척결을 결정하자 귀국, 매국노 처단에 나섰다. 우선 이토 히로부미 통감 처단을 노렸으나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암살로 대신 을사5적인 총리대신 이완용 척결을 준비했다. 의거 직전 김구에게 "이완용을 위시하여 몇 놈을 죽이고자 준비 중"이라며 단도, 단총과 이완용 사진 등을 품속에서 꺼내 보였다.

1909년 12월 종현 천주교당(현 명동성당)의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온 이완용을 칼로 찔렀으나 실패하고 붙잡혔다. 경찰이 공범을 묻자 "큰일을 하는데 무슨 놈의 공범이 필요하냐. 공범이 있다면 2천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며 의연함을 보였다. 1910년 5월 사형선고 뒤 오늘 24세로 순국했다. 조선 패망(10월 1일) 전날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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