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북으로 간 가수 김선초(상)

가출, 배우활동, 그리고 가수…파란만장의 삶

가수 김선초(金仙草, 1910∼?)가 살아갔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바로 그녀의 삶 자체가 파도타기의 연속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도 민족사의 참으로 거칠었던 대파란(大波瀾)의 연속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엄청난 충격을 요리조리 운수 좋게 피해가다가 기어이 그 격류에 휘말려 깊은 바다 속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한 선수의 불행한 결말을 보는 듯합니다.

가수 김선초는 동해의 파도소리가 들리는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장사를 하던 아버지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닐 때 원산기독교예배당을 다니며 독창과 찬양대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때부터 주변에서 이미 손색없는 성악가란 소리를 들었지요. 그 말에 의기가 오른 김선초는 음악가가 되기 위해 서울로 가려는 뜻을 밝혔지만 부모는 한사코 거절하며 만류했습니다. 그리하여 김선초는 16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로 여러 해 동안 너무 갑갑했던 나머지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서 아버지를 졸라 원산의 루씨여고(樓氏女高)에 진학했습니다.

재학 중에도 여전히 음악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돌연히 망하게 되자 김선초는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선초는 어느 날 보따리를 싸서 무작정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서울이었고, 극작가 홍해성(洪海星) 선생이 주도하던 극예술연구회의 신무대였습니다. 신무대에서 배우로 입단하여 연기수업에 전념했습니다. 신흥극단에 연구생으로 들어갈 때는 김선영(金鮮英)과 함께 입단했지요. 1930년 11월 11일 오후 7시,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된 신흥극장 창단작품으로 발표된 영화 '모란등기'(牧丹登記)에 당시의 유명배우 심영, 박제행, 석금성, 강석연, 강석제, 김연실 등과 함께 출연했습니다.

이어서 임서방(任曙昉)이 이끌던 예술좌에 들어가 전국을 순회공연하면서 연기자로서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나중에 김선초는 이 무렵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생애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은 홍해성과 임서방 두 분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김선초는 연기수업에 전념하는 틈틈이 극단의 기악부 연주자들로부터 음악수업을 받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자연스럽게 무대메뉴로 이어져 연극공연 사이사이의 공백시간에 출연하는 막간가수로서 인기를 얻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의 극단운영과 현실은 참으로 영세하고 생명 또한 짧았던 것 같습니다. 새로 극단이 꾸려졌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어느 틈에 바람처럼 사라진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김선초가 참가했던 극단 신무대, 예술좌, 토월회, 신흥극장, 명일극장, 태양극장, 동양극장, 아랑, 중외극장의 미나토좌 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배우보다도 막간가수로서의 인기가 점점 드높아가던 무렵에 콜럼비아레코드사로부터 전속 제의가 왔고 김선초는 이를 감격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김선초가 정식가수로서 데뷔음반을 발표한 1931년입니다. 그 음반에 수록된 작품은 유행소곡 '애달픈 밤'과 '안해의 무덤' 두 곡입니다.

그로부터 콜럼비아레코드사를 통해서 김선초는 무려 68편이 넘는 음반을 발매하게 됩니다. 김선초가 전 생애를 통해 남기고 있는 음반은 77편가량입니다. 콜럼비아 이외에는 이글, 시에론, 빅터사에서 소수의 음반을 내고 있지만 오로지 콜럼비아사가 김선초의 주된 터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선초 음반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가요곡이 56편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넌센스 등이 21편입니다. 가요의 종류로는 유행소곡, 유행가, 민요, 유행만곡, 가요곡으로 붙은 명칭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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