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진짜 사나이

한때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로 취급되던 군대 이야기가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힘든 훈련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전우애, 내무반 생활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멋있게 포장해 놓으니 꽤 그럴듯하게 보인다. 예능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진지한 연예인들의 모습과 절도 있는 언행이 '진짜 사나이'라는 제목에 맞게도 보인다. 그렇지만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 떠올리는 것은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저건 다 가짜야. 진짜는 따로 있지'라는 생각이다.

사실 남자들이 군대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기겁을 하는 이유는 훈련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갈구다'라는 단어로 대표될 수 있는 내무생활 때문이다. '갈구다'는 군대에서 후임병에게 교묘하게 스트레스를 주고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것을 가리키던 일종의 사회 방언이 일반 직장과 같이 상하관계가 있는 곳에서도 사용되는 말이다. 왜 그런 상황을 '갈구다'라고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 미역이나 다시마를 바짝 튀기는 것을 '갈구다'라고 하는 것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잔소리를 하는 것을 '들볶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여성들의 쉴 새 없는 잔소리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의미는 비슷하면서 여성적인 느낌이 없는 '갈구다'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다.

군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늘 고참들의 갈굼이 있는 내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아마 'TV는 원수를 찾아서'라는 사람 찾아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대부분 군대 고참을 찾을 것이다.) 내무생활을 하면서 후임병을 갈구기 위해서는 작은 부분 하나하나도 지적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성격이 필연적으로 '쪼잔'하게 된다. 진짜 사나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통 크게 봐 줄 수도 있어야 하는데, 습관이 그렇게 들다 보니 사소한 것 하나도 용서가 안 된다.

내가 상병 때 하루는 아침 근무 교대하고 온 고참이 상병들을 다 모아서 원산폭격부터 시켰다. 영문도 모르고 머리를 박고 있을 때 고참이 말했다. "내가 우유 안 남겨 놨다고 하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기본이 안 돼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머리를 박고 있던 상병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고참 우유 안 남겨 놨구나!'

고참의 말은 후임병들의 기본이 안 돼 있음을 질책하는 사나이다움이라는 것은 이미 '아니고'에서 다 사라지고 한없이 쪼잔해 보이기만 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쫄쫄 굶으면서 근무 서다 왔는데, 근무자 거 안 챙겨놔서 화난다"라고 했으면 후임병들이 자신들이 기본적인 것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해 참 미안해했을 것이다. 진짜 사나이는 겉으로만 강해 보인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능인고 교사 chamt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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