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명칼럼] 청춘 1년의 가치와 10억 원

열흘 전쯤의 일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 가운데 상당수가 '10억 원과 1년 감옥 생활을 바꿀 수 있다'고 답한 설문 조사 결과를 접했다. 청소년 둘을 둔 아버지로서 '설마?'했다. 앞길이 구만리 같다는 청춘들이 아닌가. 구만리 너머에 어떤 세상이 기다리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보다는 눈앞의 10억 원에 손을 내밀겠다는 게 얼른 이해가 안 됐다. 기가 막혔다.

이 수치는 흥사단이 전국 초'중'고교생 2만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 정직지수와 윤리의식' 조사 결과다. 조사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0억 원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질문에 초등학생 16%, 중학생 33%, 고등학생 47% 등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고등학생들은 절반에 가까울 정도였고 초등학생의 세 배나 됐다. 전년도 조사 수치보다도 올랐다. 조사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대학생들은 보나 마나 50%도 훌쩍 넘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이가 들수록 청춘이 아니라 10억 원 쪽으로 몰리고,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흥사단은 이 조사 결과를 두고 청소년들의 금전관이 왜곡되고 윤리의식이 실종된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식의 진단이라면 처방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강화밖에 없다. 결과는 뻔하다. 겉돌기만 할 뿐이다. 그보다는 얼음같이 차갑고 냉정한 우리 현실에 대한 진단이 먼저다.

과연 10억 원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3천여 달러. 4인 가족이면 연간 소득이 10만 달러 정도가 된다. 현재 환율에 따라 원화로 환산하면 1억 원을 조금 넘는다. 10억 원은 단순 계산으로 이런 가정에서 10년 가까이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 모아야 만질 수 있는 돈이다. 거액이다.

하지만 아무리 10억 원이 크고 많은 돈이라도 청춘 1년과 바꿀 수는 없다. 그만큼 청춘의 무게와 가치는 대단하다. 국어 교과서에도 나오는 '청춘예찬'의 첫 머리는 이렇다.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은 너무나 고귀한 것이다. 값으로 따질 수 없다. 청춘은 그 자체로 인생의 황금기이며, 또 다른 황금기를 만드는 준비 기간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미래 주역들은 이 청춘기에서 1년씩이나 떼어내 희생할 만큼 10억 원의 위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세상이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1년이 그냥 1년이 아니다. 평생을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할 '별'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런데도 1년 감옥을 살더라도 10억 원이 생기면 좋겠다니. 세상을 살 만큼 산 이들도 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그런데 청소년들이 덥석 그 선택을 한 것이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뭔가 원인이 있겠지. 청소년들이 괜히 그런 선택을 할까? 무슨 신호나 사인을 받았겠지. 그런 생각을 갖고 주변을 둘러보라. 가정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사회에서 매일매일 보고 듣는 것들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고민도 없이 청춘의 1년보다 10억 원에 손을 내밀도록 하고 있지 않는가? '구만리 청춘을 열심히 달려가 봐야 10억 원이라는 돈을 절대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패배감과 절망감을 세상이 심어주고 있지 않는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닿을 수 없는 세상이 있다는 현실을 청소년들이 너무 일찍 알아버린 건 아닐까? 무슨 꿈이든 꿀 수 있고 어떤 생각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할 청춘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세상이 어떻길래? 신문과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소위 힘센 사람, 돈 많은 사람, 잘나가는 사람들을 보라. 직업과 나이는 달라도 탐욕에 가득 차 있고, 거짓말에 능하고. 얼굴은 물론 가슴에도 철판을 깔고 있는 것은 하나같다. 저들은 지금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청춘들에게 교과서처럼 살아봐야 별 볼 일 없는 '10억 원 미만의 인생일 뿐'이라는 것을 멀티미디어를 동원해 '산 교육'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저들이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게 너무 걱정스럽지 않은가?

현실이 그렇다면 청소년의 선택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절반을 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대견하다. 이미 답은 다 나온 건데 오히려 지금에서야 떠드는 어른들의 호들갑을 청소년들이 어떻게 볼까 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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