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은 '항이'(Hangi)라는 전통 방식으로 음식을 조리한다. 커다랗게 판 구덩이에 장작불에 뜨겁게 달궈 낸 호박돌을 가득 채운 다음 그 위에 석쇠를 걸쳐놓고 양고기를 얹는다. 그리고 닭고기와 고구마, 감자를 켜켜이 더 얹고 다시 바나나 이파리와 마대를 덮은 다음 흙으로 밀봉한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아 음식 맛이 특별하지 않은데도 1인분에 적어도 10만원이다. 하지만 비싸다고 여기는 이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마오리족의 항이 음식 전통 퍼포먼스는 산업화 과정에서 사라져 버린 우리의 향토음식 전통 조리법의 상업적 가치를 다시 생각게 한다.
◆스토리텔링과 퍼포먼스, 향토음식 부가가치 극대화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도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모습/ 더욱 아름다워라' 우리가 즐겨 부르던 노래 '연가'는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전통 민요다. 뉴질랜드 북섬 오클랜드 공항에서 승용차로 3시간 정도 달리면 이 노래의 고향인 로토루아(Rotorua) 호수를 만난다. 이 호수에는 원수지간 부족의 마오리족 남녀가 사랑에 빠져 호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애달픈 이야기가 서려 있다. 여주인공 히네모아(Hinemoa)는 로토루아시의 거리 이름으로 남아 있다. "타마키라는 부족이 이 호수변 마오리족 중에는 가장 용맹했다고 합니다. 지금 봐도 남녀 모두 몸집이 큰데요. 아직도 저 숲 속에서 옛날 그대로 살고 있어요." 로토루아시 펜톤(Fenton) 스트리트 모텔 아린(Aalyn)의 주인으로 뉴질랜드 이민 1세대인 김영호(64) 씨는 "집 바로 옆이 히네모아의 부족이 살고 있는 타마키 전통마을"이라며 로토루아 호수와 연가 이야기를 풀어놨다. 세계화된 마오리족 민요와 히네모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모두 마오리족 전통음식 항이의 스토리텔링 소재로선 그만이다.
마오리족의 퍼포먼스는 관광객과 부족의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오리족 장승이 많이 세워진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조용하던 숲 속 곳곳에서 괴성이 연이어 들려 온다. 자신들의 영역에 얼씬거리는 불청객을 발견한 마오리족들이 서로 연락하며 질러대는 소리다. 차츰 가까워지는 괴성에 관광객들이 무서워한다. 얼굴에 문신을 잔뜩 한 마오리족이 갑자기 숲 밖으로 뛰쳐나와 창을 돌리며 혓바닥을 널름거린다. 눈알을 뒤집고 눈썹을 치켜세우고, 무서운 표정을 반복한다. 콧김을 내뿜으며 금방이라고 창으로 찌를 듯한 기세다. '우리 땅에 함부로 들어온 너희들을 죽이겠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대거 몰려나온 마오리족은 괴성을 질러대고 위협적인 행동을 계속하다가 관광객에게 나뭇가지를 던진다. 전쟁과 평화 중 하나를 택하라는 행동이다. 나뭇가지를 밟는 날엔 곧바로 전쟁이다. 나뭇가지를 가만히 주워들면 서로 잘 지내자는 평화로 받아들인다. 관광객이 나뭇가지를 주워들자 괴성이 "꺄오라!"(Kiaora!)라는 환영 인사말로 바뀐다. 깃털을 머리에 꽂은 마오리족 청년은 코를 맞대는 인사를 하고 어둠이 깔리는 숲 속으로 들어오라고 안내한다. 마오리족은 오두막집 앞에서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행사를 선보이기 시작해 다이내믹한 전통춤, 그리고 민요를 구성지게 부르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마오리족 전통음식 항이, 무첨가 내추럴푸드로 차별화
마오리족 전통마을의 마지막 체험 코스는 전통음식 항이 체험이다. 삽으로 흙을 파내면 흙구덩이 속에서 뜨거운 김이 물씬 솟아오르고 푹 익힌 고기와 감자, 고구마를 차례로 꺼내 보여 준다. 항이는 땅에 지름 1m20㎝가량의 구덩이를 판 뒤 그 속에 호박돌만 한 돌멩이를 뜨겁게 달궈 채운다. 그런 다음 석쇠 광주리에 담은 양고기와 통닭, 고구마, 감자도 얹은 다음 흙이 묻지 않도록 여러 겹의 포대를 올리고 열기가 새지 않게 흙을 덮는다. 돌멩이의 뜨거운 열에 양고기와 통닭이 노르스름하게 익었다. 얼굴에 문신을 한 마오리족 전사 나임 조니(34) 씨와 헤케 타레이(21) 씨가 혓바닥을 내밀면서 장난기를 부린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조리과정 자체가 흥미로운 퍼포먼스다.
"꽃불이 없는 달군 돌멩이로 조리하기 때문에 고기가 타지 않고 재료의 순수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항이의 책임자인 덴마카라카 마아크(48) 씨는 공연이 진행되는 도중 항이음식을 썰어 뷔페식으로 차려 놓는다. 그는 "항이음식은 일체의 첨가물이 없어 건강에 유익한 웰빙 음식이자 힐링 음식"이라고 자랑했다.
양고기는 물론이고 통닭과 당근, 고구마, 피감자 모두가 노릇노릇하게 잘 익었다. 빵가루에 닭고기와 야채를 섞어 버무린 스타링이라는 음식도 차려놨다. 마오리족의 주식이다. 관절염에 좋다는 그린 머슬(Green Mussel)이라는 뉴질랜드 특산 녹색 홍합도 쪄 놨다. 물렁하게 푹 익은 고구마에서는 불 냄새가 물씬 난다. 4시간 동안 푹 익힌 덕분에 입안 가득히 부드러운 식감을 선사한다. 피감자와 당근에서도 불 냄새가 가득하다. 기름이 쪽 빠진 양고기 맛은 구수하고 담백하다. 생선도 항이로 익혀냈다. 음식엔 소금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린 머슬만이 바닷물 소금기로 간이 돼 짭짤하다. 다만 곁들여 차려진 칠리소스와 포도잼, 사과잼이 매콤 달콤 새콤해 유일한 맛 추임새일 뿐이다. 이곳에서 31년째 일하고 있는 드라먼 체리(57'여) 씨는 "돼지고기를 항이로 익히면 더 맛있지만 이를 먹지 않는 사람들을 배려하느라 양고기를 쓴다"고 했다. 마오리 전통음식을 마주한 관광객들은 마냥 신기한 표정이다. 특별한 맛이 없어도 다들 이색적인 저녁식사에 행복해한다.
◆가장 전통적인 문화가 세계적인 경쟁력
마오리족의 퍼포먼스 디너쇼는 오후 7시부터 2시간가량 이어진다. 공연은 무료지만 전통음식 항이의 가격은 비싸다. 1인분에 110달러로 우리 돈으로 13만원 정도 된다. 비슷한 방식의 하와이 전통음식인 칼루아피그나 라우라우는 1인분에 6달러 90센트. 무려 16배나 비싼 셈이다. 그런데도 손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타마키 부족 덕(Doug'52) 추장의 장녀인 라일라(Lila'24) 씨는 "비수기인 겨울에는 하루 손님이 70~80명, 여름철에는 100~200명이 다녀간다"고 했다. 하루 평균 수입이 1천500만원, 연간 50억원이 넘는다.
5만㎡ 규모의 숲 속에서 사는 타마키 부족은 120명 정도. 모두 가까운 가족들이다. 이 중 20여 명의 마오리족 젊은이들이 전사로서 퍼포먼스와 손님맞이 이벤트에 참여한다. 타마키 부족은 체험행사와 실내공연장, 식당 등 1만여㎡ 규모의 시설을 갖췄다. 로토루아 시내 호텔과 대형 레스토랑 10여 곳에서도 마오리족의 전통음식 항이를 흉내 낸다. 하지만 전통방식을 고집하며 마오리족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곳은 타마키 마을이 유일하다. 무서운 얼굴을 한 타마키 부족과 히네모아의 지고지순한 사랑, 그리고 원시적 조리 방식인 항이가 한데 어우러져 값을 따지지 않는 전통음식 세계화를 이뤄 낸 것이다.
뜨겁게 달군 돌멩이의 은근한 열을 이용해 재료를 익히는 '어쓰 오븐'(Earth Oven) 방식은 뉴질랜드와 쿡아일랜드, 피지, 파푸아뉴기니 등 남태평양 폴리네시안들과 하와이안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슬로푸드다. 하와이에서는 칼루아피그와 라우라우, 피지에서는 로보(Lovo)로 불리지만 하는 방식은 거의 비슷하다.
이 방식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경북 북부지역과 강원도에는 '감자상곳' 또는 '감자삼굿'이라고 부르는 조리 방식이 있다. 냇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장작이 활활 탈 때 자갈을 던져 넣은 다음 꽃불이 꺼지면 뜨겁게 달궈진 자갈더미 위에 감자와 고구마, 풋옥수수를 얹고 나뭇잎과 흙으로 덮어 익혀 내는 방식이다. 냇가에서 미역을 감다가 출출해지면 흙을 파내고 익은 감자를 골라 먹는 감자상곳은 봉화군 재산면 남면리 주민들이 여름철 풋굿행사로 즐긴다. 가장 전통적인 문화가 가장 세계적인 경쟁력을 낳는다는 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뉴질랜드 로토루아에서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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