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호동락] 고양이 도둑

저녁 무렵, 어디선가 뽀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낯선 소리에 덜컥 겁을 집어먹고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보니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한동안 들렸다 멈췄다를 계속 반복한다. 살금살금 몸을 움직여 소리의 근원지로 다가가니 희뿌연 뒷모습이 보인다. 힘껏 몸을 길게 늘인 채 사료 상자 안에 목을 들이밀고 있는 그 뒤태의 주인공은 바로 체셔다. 녀석은 사료를 주문하면 가끔 기호도 테스트를 해 보라며 주는 샘플이 있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고 있다. 그래서 사료 상자를 뒤져서 샘플 봉지를 찾아낸 후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입으로 물어 꺼낸다. 그러고는 이빨과 앞발을 사용하여 비닐을 찢고, 내용물만 싹 먹어치우고는 사라져버리는 주도면밀한 범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처음에 봤을 땐 기가 막혔다. 사료 상자 안에 보관해 놓았던 것들이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채, 비닐엔 자잘한 구멍이 잔뜩 뚫려 있고 내용물은 온데간데없으니 말이다. 그것도 기호가 특이해 자세히 살펴보면 평소에 좋아하던 사료만 냉큼 먹어치우고 별로 맛이 없는 냄새가 나는 사료 샘플들은 건드리지 않고 상자 안에 고이 모셔뒀다.

처음 비닐봉투의 잔해를 발견했을 땐 집에서 그럴만한 생명체라곤 체셔밖에 없었기에 의심할 것도 없이 주범이 체셔란 걸 알았지만 중간 과정을 전혀 못 봤기에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게다가 이미 상황 종료가 되었기에 야단을 치기에도 애매했고, 그저 사료 상자를 체셔가 못 뛰어올라갈 만한 위치로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사료도 늘 있고 간식도 자주 먹는 녀석에게 대체 뭐가 불만이라서 사료 통을 뒤지는 거냐고 핀잔 줬을 뿐이다.

최근 몇 년간 반복되던 사료 도둑질 현장을 드디어 포착했다. 한동안 사료상자를 뒤지지 않기에 방심하고 바닥에 내려놓은 채 뒀던 어느 날 저녁, 사료상자가 있는 방에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가만히 다가갔더니 막 사료상자에서 봉지를 물고 내려놓는 녀석과 딱 마주쳤다. 게다가 그 옆자리엔 이 광경을 목격하고도 방조 중인 앨리샤도 있었다. 체셔의 범행을 묵인하고 얌전히 앉아 있던 앨리샤는 체셔가 물고 나온 비닐봉지를 찢는 데 성공하자 몸을 일으키고 다가가 함께 사료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원래는 현장을 발견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야단을 칠 생각이었지만 막상 현장을 마주하고 나니 도저히 혼낼 수가 없었다. 그 사료 하나를 꺼내어보겠다고 상자에 목을 쭉 빼서 집어넣고 그나마 바닥에 닿아 있는 뒷발을 뒤꿈치마저 들고 위태하게 몸을 지탱하고 있는 체셔도 귀여웠고, 무슨 망 보는 역할인처럼 옆에서 다소곳이 앉아서 체셔를 지켜보는 앨리샤도 너무 웃겼다. 이렇게 자그마한 두 고양이 도둑은 현장에서 발각되어 고생해서 뜯은 사료 봉지를 뺏기고 사료 상자 앞에서 상실감과 허탈감에 빠져야 했다. 물론 찢어진 비닐 안에 있던 사료는 녀석들 몰래 내가 사료그릇에 살짝 부어놓았지만 말이다.

체셔의 이런 모습을 누가 보면 극도로 절제된 급식을 하거나 밥을 주지 않고 굶기는 줄 알 노릇이다. 사실 배가 고팠다면 정작 다 먹었어야 당연한 사료 그릇에 있는 사료는 늘 남아 있고, 샘플 봉지 안에 들었던 사료 역시 좋아하는 것 같아서 구매를 해서 사료 그릇에 부어놓으면 금세 시큰둥해진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녀석은 몰래 빼먹어야만 감칠맛이 더해져 맛있다고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 현장을 목격하고도 혼을 내지 않았기 때문일까, 체셔는 더욱 대범해져서 틈만 나면 사료 상자 안을 습격한다. 하지만 이렇게 상습범이 되어도 결코 미워할 수가 없다. 도둑이긴 하지만 제 곳간을 스스로 축내는 너무나 귀여운 고양이 도둑이기 때문이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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