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해치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재판은 신에 의한 심판이라는 의미가 더 컸다. 신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믿음에서 신의 뜻에 따라 선과 악을 가렸다. 신의 심판에는 뱀이나 조개, 양 등의 도구가 쓰였지만 '양신판'(羊神判)이 가장 정통하다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일본 한문학의 권위자인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가 대표적이다. 법(法)이나 경(慶), 선(善), 의(義) 등은 모두 양(羊)이라는 한자에서 유래한 것이 그 근거다.

법(法)의 초기 한자는 수(氵)와 치(廌), 거(去)가 합해진 글자다. 신의 심판에서 진 사람과 외뿔 양인 해치(解廌), 뚜껑이 벗겨진 서약서를 담은 그릇을 모두 한꺼번에 물에 흘려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치가 없어지고 현재의 法(법)이라는 형태가 됐다. 양(羊)과 언(言) 두 글자를 합친 선(善)은 원고와 피고 두 사람의 말 앞에 신성한 양을 놓고 신의 뜻을 묻는다는 뜻이다. 양의 옆 모습을 본뜬 치(廌)에서 파생된 경(慶)은 재판에서 이긴 사람이 기뻐서 해치 가슴팍에 표시를 새기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다.

신성한 양은 실제 양이 아니라 해치(解廌·解豸)라는 상상의 동물이다. '설문해자'에 '해치는 산양을 닮았고 외뿔이며 송사를 따질 때 정직하지 않은 자에게 만지게 했다'고 되어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죄인을 '치이'라는 동물의 가죽으로 싸서 물에 내다버렸는데 부정한 것을 씻는다는 의미와 함께 법의 정의를 알 수 있다. 해치와 법의 상관관계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하다.

해치는 고대 사회에서 선악과 시비를 판단하는 힘을 가졌다고 믿는 동물이다. 이후 봉건 군주의 기강과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됐는데 경복궁의 해태상도 그렇다. 서울시가 2008년 도시 상징 캐릭터를 기존의 왕범 대신 해치로 교체했다.

외교부가 '웃는 해치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증해 설치한다는 소식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소재한 '평화의 궁'에 한국을 상징하는 예술품 기증 프로그램에 따라 공모를 거쳐 선정했다. 국제법 전당으로 통하는 평화의 궁은 카네기 재단이 기증한 건물로 프랑스, 러시아, 일본, 중국 등 각국의 건축 자재와 예술품으로 꾸며져 있지만 우리 예술품은 전무했다. 해치상은 국제사법재판소의 역할에도 걸맞다. 법과 정의의 메신저인 '웃는 해치'의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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