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족력-난, 불량유전자?

회사원 조모(54) 씨는 평소 건강관리에 극도로 예민하다. 6개월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고, 술'담배는 일절 입에 대지 않는다. 식단은 채식 위주로 꾸미고, 매일 1시간 이상 걷는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조 씨가 건강관리에 매달리는 건 다름 아닌 '가족력' 때문이다. 조 씨의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모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 씨는 "혹시 같은 질병이 찾아올까 봐 철저하게 건강관리를 하며 병의 징후를 살핀다"고 말했다.

가족 내에 특정 질환의 가족력이 있다면 자신 역시 같은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성 질환과 달리 생활습관 등 환경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고, 가족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병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가족력은 질병을 미리 예측하고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부모 모두 고혈압 50% 발병률

가족력은 유전자가 후대에 전해지는 '유전병'과는 확연히 다르다. 유전성 질환은 특정 유전자나 염색체의 변이에 의한 질병이다. 혈우병이나 낭포성 섬유증(염소 수송을 담당하는 유전자 이상으로 여러 기관에 문제를 일으키는 질병), 다운증후군, 적록색맹 등이 대표적인 유전성 질환이다. 테이-삭스(중추신경계가 점진적으로 파괴되는 질환) 병은 독일과 폴란드의 유대인들 사이에 흔하고 지중해 빈혈은 지중해 지방과 아시아에서 많이 나타난다.

반면 가족력은 흡연, 음주, 음식 등의 생활습관과 주거환경, 직업 등의 환경적인 요인에 큰 영향을 받는 '다인자 질환'이다. 체질적으로 특정 질환에 취약한데다 가족끼리 같은 생활습관을 공유하면서 발생한다.

가족력 질병으로는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뇌졸중, 심장병 등 대사성 질환이 많다. 고혈압의 경우 부모 모두 정상일 때 자녀가 고혈압일 확률은 4% 정도지만 부모 중 한쪽이 고혈압이면 30%, 양쪽 모두면 50%까지 발병 가능성이 높아진다. 당뇨병도 부모 중 한 명이 제2형 당뇨병일 경우 자녀에게서 당뇨병이 발생할 확률은 10~30%다. 부모 모두 제2형 당뇨병이 있으면 자녀에게서 당뇨병이 생길 가능성은 40% 정도로 알려졌다. 심장질환도 가족 중 환자가 있을 경우 발병률이 2배 이상 높아진다.

암의 경우 유방암과 대장암, 폐암, 갑상선암, 위암 등이 대표적이다. 2004년 국제암학회지에 따르면 부모가 암일 경우 자녀가 암에 걸릴 확률은 일반인에 비해 2~5배가량 높다. 갑상선암일 경우 자녀가 걸릴 확률은 3.26배 높아지고, 폐암은 2.9배, 위암은 2.17배, 대장암의 발병 확률도 1.86배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유방암학회가 6년간 전국 36개 병원 유방암센터에서 유전성 유방암 고위험군 환자와 가족 3천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유방암 환자 2천526명 가운데 16.5%(418명)에서 유전성 유방암을 유발하는 'BRCA1/BRCA2' 변이 유전자가 발견됐다. 가족 중에 유방암 환자가 본인을 제외하고 1명 이상이면 돌연변이 유전자를 보유한 유병률이 18.7%였으며, 2명 이상이면 33.3%, 3명 이상이면 절반 이상이 돌연변이 유전자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력 무조건 두려워말라!

가족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유전보다는 생활습관이다. 수명과 질병은 유전자 등 선천적 요인과 생활습관 등 후천적 요인의 영향은 3대7 정도로 후천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

가족은 한 공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같은 생활환경에 노출된다. 특히 암과 고혈압, 당뇨병, 심장질환, 고지혈증 등의 가족력 질환은 식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짜고 맵고 단 자극적인 음식과 육류, 인스턴트 음식을 즐겨 먹는 가족은 그렇지 않은 가족에 비해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다. 가족은 다른 구성원의 생활 습관에도 영향을 받는다. 대표적인 것이 수면이다. 부부 중 한 명이 텔레비전이나 음악, 수면 등을 켜고 자면 나머지 한 명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

계명대 가정의학과 김대현 교수는 "부모의 유전자나 가족력을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지려 노력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가 질병예방과 건강증진의 왕도"라고 조언했다.

가족력을 고려하면 미리 질병을 예방하고 합병증을 조절할 수 있다. 고혈압 가족력이 있으면 혈압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정기적으로 혈압을 측정하고 비만, 나트륨 과다섭취, 흡연, 음주, 운동 부족 등 고혈압을 유발하는 환경적 요인을 개선해야 한다. 고혈압은 치료 시기를 놓치면 심장비대와 심부전, 뇌졸중, 신부전 등 합병증이 생긴다.

당뇨병은 비만과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운동과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고, 적절한 열량을 섭취하되 편식하지 않는 습관이 중요하다. 식전과 식후의 혈당을 1년에 1회 이상 정기적으로 측정하면 당뇨병의 예방과 조기발견에 도움이 된다.

암의 경우 55세 이전에 성인병이나 암이 발생한 가족이 있다면 정기검진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 유방암도 가족력이 있다면 40세 이전부터 매년 검진을 받는 것이 좋다.

경북대병원 가정의학과 윤창호 교수는 "어릴 때 굳어진 생활습관은 성인이 되어 고치기 정말 어렵다. 부모가 어떻게 건강한 습관을 길러주느냐가 자녀들의 건강과 직결되는 이유"라면서 "건강관리의 시작은 결국 가족"이라고 말했다.

도움말=경북대병원 가정의학과 윤창호 교수, 계명대 동산병원 가정의학과 김대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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