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출동 24시 현장기록 112] '비닐봉지'가 영어로 뭐더라?

다문화가정에서의 가정불화 또는 가정폭력에 대한 신고도 적지 않게 접수된다. 얼마 전에는 가출한 다문화 여성이 기차에 뛰어들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정확한 통계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일반 가정에 비해 비교적 많은 신고가 접수된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신고 사건의 내용들을 파악해 보면 부부간의 불화로 인한 폭력도 있지만, 시부모와의 갈등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3년 전 미국에 몇 달간 머물 기회가 있었다. 낯선 나라에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있는 것이 처음이어서 좀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영어를 배워 왔는데, 필요한 것 사고, 먹고, 돌아다니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지 않겠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미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깨지고 말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생필품 몇 가지를 사려고 편의점에 들렀다. 샴푸, 비누 등등 필요한 것들을 바구니에 담았더니 꽤 양이 많아져서 비닐봉지에 담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 순간 '비닐봉지'를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비닐봉지가 영어로 뭐지? 비닐…백? '비닐'이 영어는 아니지 않나? 아니야, 왠지 영어 같기도 하고…. 그냥 보디랭귀지로 할까?' 혼자 고민하다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그냥 손으로 들고 갈 수 있을 만큼만 남기고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계산하려고 가져갔는데 점원의 말은 또 왜 그렇게 빠른 건지.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배워왔던 내용으로는 물건을 사는 일은 내가 "이거 얼마예요?" 하면 점원은 "몇달러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고, 그럼 그냥 돈을 내고 가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원은 뭘 이리 복잡하게 이야기하는지….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그 점원은 다시 천천히 말해 주었다. 들어 보니 '이건 얼마고, 신용카드로 결제할 것인지 직불카드로 결제할 것인지, 직불카드라면 비밀번호를 입력해라, 비닐봉지는 필요하냐…' 등등 이런 내용들이었다.

영어가 익숙지 않으니, 그곳에서는 마치 내가 유치원생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당장 직장이 없더라도 공무원시험을 치든, 기업에 들어가든 취직을 할 수 있겠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편의점'세탁소 아르바이트 종업원 외에는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아마 내가 그곳에서 계속 살아야 했다면 너무나도 막막했을 것이다.

아마도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나 다문화 결혼이민자 등도 비슷한 심정, 비슷한 상황에 있지 않을까? 지난 9월 기준, 우리나라에 체류 중인 외국인은 여행객을 제외하고도 약 163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 일부 중국동포들을 제외하고 나면 한국말에 서툰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112종합상황실에서 근무하다 보면, 이들의 어려움을 직접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더듬거리는 말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신고자)"여…보…세…요? help me…."

(경찰관)"네, 어느 나라 분이세요?(통역을 연결하기 위해 국적을 먼저 물어본다)"

(신고자)"우즈벡… 우즈벡…."

통역콜센터에 연결했지만 통역관이 마침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우즈벡어는 통역요원을 당장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경찰관과 직접 떠듬떠듬 대화를 이어나갔다.

(경찰관)"무슨 일? 무슨 일? what problem?"(신고자가 알아듣기 쉽도록 짧게 물어본다)

(신고자)"뿌…쩐…톤…넬…. help me…. 친구 전화 안 돼요…."

(경찰관)"뿌…쩐…?"

약 20분간 통화하면서 영어로, 그것도 안 되면 영어 스펠링을 한 자 한 자씩 이야기해 가며 내용을 파악했다. 결국 알아낸 것은 '불정터널' 앞에서 타이어에 펑크가 나는 바람에 도롯가에 서 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었으면 보험회사 긴급출동 서비스를 부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위험한 도롯가에서 한참 동안 고생하며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한편, 다문화가정에서의 가정불화 또는 가정폭력에 대한 신고도 적지 않게 접수된다. 얼마 전에는 가출한 다문화 여성이 기차에 뛰어들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정확한 통계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일반 가정에 비해 비교적 많은 신고가 접수된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신고사건의 내용들을 파악해 보면 부부간의 불화로 인한 폭력도 있지만, 시부모와의 갈등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시부모 입장에서는 세상물정도 잘 모르고, 음식이나 집안살림도 기대에 못 미치는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아닐까?

예전에 '사장님 나빠요'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낸 개그 프로그램이 있었다. 어눌한 한국말의 외국인 노동자와 나쁜 한국인 사장님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약 10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여전히 이들에 대한 관심은 부족하고, 이들에 대한 인식은 차갑다. 비록 한국말이 서툴거나 어눌하다 해서, 그 사람도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해서, 한국에서도 유치원생 같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 경북도 농촌과 공장지역이 많아 이들 외국인 체류자'이민자들이 많이 있다.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우리나라를 찾아온 이들에 대해 보다 존중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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