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화와 현실을 잇는 금오산] <6>금오산성 외성

청나라에 항복한 조선 인조의 恨…치욕 갚으려 3,700m 외성 쌓아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1637년 1월 30일 혹한의 날씨 속에서 조선 16대 국왕인 인조 임금은 피란처였던 남한산성을 나섰다.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기 위해서였다. 항복의 예에 따라 임금이 입는 곤룡포를 벗고 신하의 옷인 남색 전복 차림이었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지 47일 만이었다.

◆청 태종, "조선의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라!"

조선 정조 때 이긍익이 지은 역사책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그 광경을 이렇게 전한다. '전하께서 남색 전복 차림으로 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성을 나섰다. 전하께서는 삼공육경(三公六卿)을 거느리시고 백 보가량 걸어가 평지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셨다.'

또한 '인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께서 삼전도로 나아갔다. 멀리 청태종이 황옥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로 무장한 병사들이 방진을 치고 서 있었다. 전하께서 걸어서 진 앞에 이르렀다. 용골대의 보고를 받은 청태종이 말했다. "지난날의 일을 다 말하려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다행스럽고 기쁘다." 주상전하께서 답했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이날 인조 임금은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바닥에 찧는 예를 올렸는데, 이 모습에 배열한 신하들이 주상전하를 외치며 울부짖었다. 이날 항복으로 조선의 왕자와 대신들이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갔고, 수만 명의 처녀들이 노예와 성적 노리개로 끌려갔다.

이 외에 청나라는 항복 조건으로 조선은 청나라에 군신의 예를 다할 것, 매년 청나라의 경조사에 예를 행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매년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을 요구했다.

또 2년 뒤에는 '대청국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라'고 요구했다. 이 비는 만주어와 몽골어, 한자로 씌어졌는데, 서울시 송파구 석촌호수 서호변에 있는 높이 5.7m, 너비 1.4m의 '삼전도비'가 그것이다. 이 비석의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조선에 폐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문 내용은 조선에서 2개를 쓰고 청나라가 그중 한 개를 택했다. 이때 인조는 "지금 저들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서 판가름난다. 월나라 구천은 오나라의 신첩 노릇을 하였지만 끝내는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이루었다. 훗날 나라가 일어서는 것은 오직 나에게 있는데, 오늘 할 일은 다만 문자로써 그들의 마음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며 말로 결코 쓰고 싶지 않은 비문을 쓴 신하들을 위로했다.

◆인조, "금오산성을 크게 키워 새로 쌓으라!"

치욕을 당한 인조임금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복종했지만 속으로는 복수하고야 말겠다고 다짐을 했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우고 청나라에 금은보석과 말, 군사와 세폐,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금오산성을 비밀리에 보수했다. 병자호란 항복 조건이었던 '조선은 성을 쌓거나 보수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위반했던 것이다.

금오산성 수축은 인조 17년(1639년) 7월부터 시작됐다. 경상감사 이명웅이 인조임금의 윤허를 얻어 수축에 나섰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성의 크기였다.

임진왜란 당시 선산부사 배설이 금오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쌓은 내성을 수리함은 물론이고, 넓은 외성을 둘러 더욱 튼튼히 했다. 이때 내성의 석축 둘레가 7천644자(尺), 높이가 7자, 무성절벽(無城絶壁)이 661보이며 성 안에 7개의 못, 한 개의 계수(溪水), 8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내성의 규모와 크기는 비슷하나 못과 우물이 증설된 것이다.

새로 쌓은 외성은 길이가 약 3천700m에 이르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나 가장 높은 곳은 14자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조는 여기에 개령과 금산, 지례 등 세 읍을 속읍으로 하고 각각 군량과 병기를 비축하고, 봄과 가을에 합동훈련을 실시하도록 했다.

인조임금이 위험을 무릅써가며 금오산성 수축에 나섰던 것은 삼전도의 치욕을 갚겠다는 마음에서였다. 한편 산성의 규모를 대폭 확대했던 것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피란에서 깨달은 바 덕분이었다. 인조임금이 대신들과 남한산성으로 피란했을 때 남한산성의 군량은 모두 6천석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남한산성 안에는 군병과 백성, 대신 등 1만4천명이 있었는데 군량은 50여일 분량에 불과했다. 성 밖으로 나가 식량을 조달하려고 했지만 청군의 봉쇄에 막혔고, 사냥을 나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조선조정은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며 각지에서 정규병력과 의병이 달려와 청군의 포위망을 풀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남한산성내의 빈약한 물자와 허약한 군대로는 더 버티기 힘든 지경이었다. 병사들은 엄동설한에 가마때기로 몸을 두르고 잠을 잤는데, 병들어 죽기 일쑤였다.

인조임금이 금오산성의 속읍을 정하고, 각각 군량과 병기를 비축하도록 하고, 봄가을에 합동훈련을 하도록 한 것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뼈아픈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