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할머니와 딸·외손녀, 3대 모녀 168년의 그림 이야기

'168년의 세상보기-3대 모녀전'

할머니 정순원 작
할머니 정순원 작 '임을 기다린다'
딸 손영숙 작
딸 손영숙 작 'Flowering'
외손녀 임규향 영상작품
외손녀 임규향 영상작품
손영숙
손영숙'정순원'임규향 씨(왼쪽부터)

할머니와 그의 딸, 그리고 외손녀까지 3대 모녀가 함께 꾸민 미술 전시회가 열린다. '168년의 세상보기-3대 모녀전'이란 제목이 붙은 이번 전시는 서울에서 갤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스마트폰 세대 임규향 씨와 새마을운동과 민주화를 몸소 체험한 서양화가 손영숙 작가, 그리고 6'25전쟁과 보릿고개 등 지난한 삶을 살아온 정순원 어르신의 세월을 초월한 시간여행전이다. '168'이란 정 어르신(86)과 손 작가(54), 그리고 임 갤러리스트(28)의 나이를 합친 것. 현재 정 어르신은 영천시 북안면에서 농사일을, 손 작가는 대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손 작가와 임 갤러리스트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정 어르신은 미술교육은 고사하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규향 씨는 "현재 나의 모습과 엄마, 그리고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가 지나온 서로 다른 시간성을 하나로 묶어 그 유기적인 시간과 관계가 뒤섞인 작품을 전시회를 통해 보여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의 시작은 작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 어르신이 갑자기 치매에 걸렸다. "충격이었지요. 원래 엄마가 똑똑했거든요. 가족 이름은 물론 7 더하기 3도 몰랐습니다. 계절을 물어보니 '가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작한 게 미술 치료였습니다." 손 작가는 기억을 살리기 위해 친정엄마에게 그림을 그려보라며 스케치북과 연필을 손에 쥐여줬다. "당시 엄마가 '미술이 뭐꼬?' 하시며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모습이 생각나요…."

정 어르신은 딸이 시키는 대로 스케치북에 연필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어떤 때는 식사도 거른 채 2시간 이상 그림 그리기에 푹 빠졌다. 정 어르신은 "처음에는 뭔지도 모르고 호작질했는데 이제는 재미있어요. 경로당 친구들도 '뭐 그리노?' 하며 신기해합니다."

정 어르신이 표현한 것은 시골의 일상. 가족과 친구, 집, 나무, 농작물 등 모두 그녀의 반복적인 일상과 1950, 60년대의 여성상을 오롯이 담았다. 오로지 직관과 감성만으로 추억의 저편에 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끄집어내 표현해낸다. 손 작가는 "막내 이모가 엄마 집에 놀러 왔다 늑대에게 물려가다 살아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도 있어요."

그림을 시작하면서 정 어르신의 치매 증세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잊어버린 기억도 되찾았고 일상적인 대화도 가능해졌다. 손 작가는 "엄마의 치매 증세가 호전된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엄마가 화가(?)로 새 인생을 살게 된 게 너무 좋다"며 활짝 웃었다.

전시는 손 작가가 먼저 제안했다. "전시회 한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갤러리스트인 규향 씨가 일사천리로 진행해 나갔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할머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울컥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할머니가 있었기에 현재 내가 있는 거잖아요."

규향 씨는 어릴 때는 외할머니와 친하지 않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농사를 지어서 그런지 항상 얼굴이 시커멓고 손도 거칠었어요. 그래서 멀리했다"며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규향 씨는 노란색 블라우스에 파란색 치마를 입은 할머니 처녀 시절 모습을 그린 '임을 기다린다'는 작품을 보고는 "할머니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며 울었어요. 이제 할머니랑 사이가 너무너무 좋아요. 그죠? 할머니…."

이번 전시에서 정 어르신은 시골생활과 추억을 회상하며 드로잉한 작품 50여 점을 선보인다. 손 작가는 회화 20여 점과 조각 작품을, 규향 씨는 영상작품을 전시한다. 전시는 10일(일)부터 2월 15일(월)까지 가창 톨레랑스(톨레랑스 갤러리, 가창면 우록리)에서 열린다. 053)768-2325.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