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역사와 가혹한 기후·환경 영향
러시아인 이유없이 웃는 사람 잘 없어
마음에 없는 미소는 접대용으로 인식
만약 웃는 사람 만난다면 진짜 '호의'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으로 갈 때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항공사 중 하나가 러시아 국영 항공인 아에로플로트란다. 타 항공사에 비해 가격이 싸다는 이점이 있어서일까. 그런데 주변에서 '악명 높은' 러시아 비행기를 타도 괜찮을지, 경유지에서 불편함은 없을지를 종종 물어온다.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게 여러모로 편하다고 조언하지만, 마지막 선택은 본인의 몫이라며 슬그머니 책임을 회피한다. 최근 서비스가 좋아졌다곤 하지만, 서비스 강국인 우리나라 사람들 눈엔 여전히 부족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러시아 항공을 처음 탔을 때, 이른바 문화충격을 경험했다. 승무원들은 화장실 근처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주류는 유료에 기내식도 형편없었다. 미소는커녕 화라도 난 것 같은 승무원의 표정에 물 한잔도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부탁해야 했다. 그런데 참 세상이 많이도 변했다. 최근에 몇 번 이용해 보니 승무원들이 방긋방긋 웃으며 서비스도 잘한다. 감사의 말을 했더니 서비스 평가 설문지를 가져다준다. 칭찬해 달라는 뜻이라 온갖 수사를 넣어서 감사의 글을 남기니 서비스가 더 좋아진다.
소련 붕괴 직전인 1990년 맥도날드 1호점이 모스크바에서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러시아인들은 두 가지에 놀랐단다.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렸던 그들은 아무리 줄이 길더라도 언젠가는 햄버거를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두 번째는 직원들이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주문을 받았다는 것이니, 자신들이 웃음에 인색한 건 러시아인들도 인정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처음 러시아를 방문하는 사람이나 러시아인들과 소통하게 되는 사람이 겪는 최초의 어려움은 바로 차갑고 미소를 잘 짓지 않는 러시아인들과 마주하는 것이다.
얼마 전 어떤 러시아 언어학자가 러시아인들이 잘 웃지 않는 이유를 열거해 놓은 걸 읽었는데,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인들은 마음에 없는 예의상의 미소를 접대용 미소라고 여기며 기피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이유 없이 미소를 짓지 않는다. 공식적인 업무를 할 때 웃거나 미소를 짓지 않는 것은 자신이 진지하게 일을 수행한다는 표시라고 한다. 심지어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웃으면서 진지하지 않게 임하는 것도 엄하게 다룬다. 얼마 전 노보시비르스크대학으로 교환학생을 간 한 학생에게 급히 연락이 왔다. 수업에 몇 번 빠져서 자신을 꾸중하는 선생님께 제대로 설명을 못 해서 미소만 짓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자신을 무시하느냐며 굉장히 화를 내고 혼냈다고 한다. 계속 웃는 얼굴로 설명을 했지만, 서로 오해가 쌓여 귀국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차여차 설명을 하고 오해는 풀었지만 이렇듯 미소 하나도 서로 다른 기호로 이해되며 문화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러시아에서 이유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워낙에 힘든 역사와 가혹한 기후 및 환경조건에 웃을 일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는 것도 맞는 말이리라. 그러니 그곳에서의 드문 미소는 늘 소중했고 진실하게 다가왔다. 톨스토이의 소설 '유년시절'에는 미소에 관한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만일 미소가 얼굴을 더욱 빛나게 하면 용모가 그만큼 더 아름답다는 뜻이고, 미소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면 그 얼굴은 평범한 얼굴이고, 만일 미소로 더욱 흉해지는 경우라면 그것은 바로 추한 얼굴이다." 외적인 아름다움의 판단에 미소라는 행위의 가치를 더한 이 구절은 미소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이해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은행에서 고객이 직원에게 웃으며 일하라고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세상 누구도 웃으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는 법원의 판결은 흥미로웠다. 미소를 당연시 여기고, 이를 강요하다 보니 오히려 진짜 미소가 사라진 우리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혹시 러시아인을 만났을 때, 미소를 지었지만 그가 당신에게 답해주지 않는다고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다. 대신 그 사람이 미소를 짓는다면 그때는 진짜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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